역도산 세트 - 전10권 - 승부사의 노래
방학기 글 그림 / 자음과모음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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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 개봉한 설경구 주연의 역도산은 무술계의 최배달과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다. 본명은 김신락이며 일본 프로레슬링을 국민 스포츠로 이끈 영웅이다. 원래 그는 일본에서 스모 선수로 활약하려고 했으나 일본인의 차별로 꿈을 이루지 못했고, 이에 따라 방황을 거듭하다가 우연히 미국의 레슬러와 싸움을 하다가 맥없이 패배하고 만다. 힘쓰는 일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던 그는 대단한 충격을 받고, 미국으로 레슬링을 배우기 위해 떠난다. 그리고 약 1년 후에 일본으로 되돌아와 일본에 우리나라에 프로레슬링 붐을 이끌게 된다. 이 만화는 그의 일대기를 방학기 선생의 특유한 필치로 그려낸 작품이다. 당시 레슬링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역도산의 가라데 촙은 일본인들을 열광케 했는데, 그가 등장하여 거구의 외국 레슬러들을 쓰러뜨리는 장면은 커다란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2차대전에 패배하여 미국인들을 우러러보던 시기라서 --항상 서양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터라-- 그러한 열광은 더더욱 컸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일본인은 민족개조론을 펼치면서 서양인들과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극진가라데의 최배달과 역도산, 두사람 모두 방학기 화백이 극화로 그려낸 자랑스런 한국인들이다. 그리고 허영만의 오래된 작품 '질수 없다' 는 일본야구계에서 무려 3천안타를 쳐낸 재일동포 장훈의 일대기를 그려낸 것이다. 가장 최근에 기억나는 인물로는 기업인 손정의가 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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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서문당 컬러백과 서양의 미술 21
임영방 엮음 / 서문당 / 199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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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예술사에 있어서 라파엘로와 미케란젤로, 다빈치의 삼각 관계는 매우 재미난 에피소드가 되고는 한다. 먼저 뒤의 두 인물은 나이가 아버지와 아들뻘인데, 말년의 다빈치는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높이 인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질투의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앞의 두 사람은 몹시나 대조적인 삶을 살았다. 가령, 라파엘로는 미남에 여성편력이 심했으나 미켈란젤로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준수한 미남자는 아니었다. 또한 전자가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한 반면 후자는 90세까지 장수했다.

으흠, 아마도 이 사실로 감안해 볼때, 인간의 수명이란 것은 정력과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런면에서 볼때 한방의 원리와 맞아떨어지는 듯도 하다. 한편, 라파엘로는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아기천사를 적재적소에 그려넣어, 상당히 코믹한 느낌으로 만들어버렸다.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 해 볼때, 이는 매우 교묘한 화법임에 틀림없다. 독자여러분도 라파엘로가 그린 천사그림을 보면 필자의 말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ㅎㅎ 그래서 그럴까? 그는 기독교 문면을 주제로한 회화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그에 비례해서 그들이 이단이라 칭하는 그리이스.로마 신화의 여러 신들을 상당수 그려서 후대에 남겼다. 특히나 삼미신이라는 작품이 그러하다. 아글라이아, 에우프로쉬네, 탈리아 라는 여신을 그린 그림인데, 그들이 각각의 손에 사과를 들고 있다. ㅋㅋㅋ. 이거 뭐야 과연 라파엘로 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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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재원 아트북 15
재원 편집부 엮음 / 재원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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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영화를 보면 세계적인 인물이나 천재를 지구인이 아닌, 외계에서 온 존재라고 설정하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 가령 맨 인 블랙이라는 영화를 보면, 엘비스 프레슬리나 마이클 잭슨등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필자도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이다. 세상에는 정말 불가사의한 존재들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를 살다간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렇다. 다빈치의 습작 스케치나 비례도 등을 보게 되면, 정말로 외계인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천재다. 말년에 그는 아무것도 완성시켜 놓은 것이 없다라고 말을 했지만, 그가 후대에 남긴 영향력은 그의 작품 이상으로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여러 평론가들은 레오나르도의 작품 '모나리자의 미소' 을 매우 극찬하고 있는데, 필자는 안목이 좁아서 그런지 너무 과장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아마 이 주제를 다룬 책만해도 수백 권은 나왔을 것이다. 필자는 도대체 그 미소가 왜 그렇게 신비로운지 알수가 없다. 레오나르도 자산이 말했듯이 그것은 미완성 작품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해석이 분분해 질 수 밖에 없고 이것이 확대재생산 되면서 펼쳐나간 것일뿐 여기에 무슨 엄청난 비밀과 코드가 숨겨진 것은 아닌것으로 본다. 나머지 여타의 사람들은 전문가들이 그렇하고 하니까 그런줄 아는것이지 뭔가 심오한 것은 없다. 아마 이 얘기는 필자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사람이 공감하는 내용일 것이다. 실제로 가서 직접 보면 그렇게 신비로운 뭔가가 있지는 않다. 사람들이란 어느 정도 과장하게 마련이고 이것이 몇 단계를 거치면서 증폭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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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 보급판
고운기 지음, 양진 사진 / 현암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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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가 집필된 시기가 고려시대이지만, 조선시대에 500년 동안 그 존재를 몰랐었다고한다. 그런데 1904년 도쿄제국대학에서 우연히 어떤 학자가 이 책을 발견하고 번역을 하면서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단재 신채효 선생마저-- 알려졌다고 한다. 이렇게 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수많은 도서가 왜국으로 약탈되면서 쓸려간 것이 첫 번째고, 두번째는 너무 중국만 바라보면서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것도 주요한 원인 중 하나다. 삼국유사가 사료로서 갖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신라, 백제, 고구려에 대한 내용만 나와 있는데 비해 --그래서 사대주의라고 비판받는다-- 삼국유사는 우리나라 땅과 그 주변에서 명멸했던 여러 나라를 담고 있다. 즉, 고조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바로 삼국유사라고 한다. 만약, 일연선사의 기록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분의 대륙적인 사고가 없었다면...... 중국이나 일본의 허접스런 역사왜곡에 대해 반박할 자료가 없었을테니 정말 아찔해진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만 바라보다 일본에게 뒤통수를 맞았는데, 지금은 미국만 바라보면서 알아서 설설설 자세를 낮추고 있으니 죈장.....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고 새시대를 열었어야 하는데,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서 100년이 넘게 진행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요 울화통이 터진다. 역사에 대해서 바로 알고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힘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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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 강세황 회화연구
변영섭 지음 / 일지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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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은 강세황의 호다. 단원 김홍도를 길러낸 스승인데, 우리나라 그림의 역사에서 서양의 원근감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시도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열린 자세를 가졌던 선비다. 당시의 조선은 오로지 중국만이 대형이고 다른 여타의 나라는 오랑캐라고 취급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마음가짐은 정말로 본받아야 한다. 세계 정세를 등한시하다가 불행했던 근현대사를 보내고 있는 우리민족을 생각해보라. 아뭏든, 그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닮고 싶었던 인물이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멘토였던 셈이다. 그러한 강세황의 작품과 일대기를 간략하게마나 알아보자.


한마디로 그는 천재였는데 시.서.화 3절에 모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조선 예술계의 거목, 총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가 영.정조 때였는데 그는 관직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거의 반 평생을 후학을 길러내는데 힘을썼으며 주로 평론가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말년인 60대에 이르러서야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중국으로 가서 새로운 문물을 직접 접할 수 있다는 판단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왜냐하면, 서양화 화법의 도입에서 보듯이 그는 진취적이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결코 꺼려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예로써 그는 72세에 노구를 이끌고 북경 사행길을 다녀왔는데, 그 와중에 많은 기록과 작품을 남겼다. 평소 그는 중국 학자들을 만나서 폭넓은 교류를 하기를 소원했었다고 한다. 앞선 문명과 문화에 대한 갈증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바이니 강세황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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