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소녀
잭 케첨 지음, 전행선 옮김 / 크롭써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공포라는 이름의 고통

 

- 어렸을 때 학교에서 단체 관람으로 이승복을 소재로 한 반공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 후반부 무장 공비들에 의해 입이 찢어지고, 머리가 깨지고, 단검에 난도질당하며 처참하게 죽어가는 이승복과 어린 동생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공포'에 사로잡히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나약하고 순수한 존재를 강하고 악한 존재가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일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괴로웠다. 함께 영화를 지켜보던 여학생들 대부분은 비명을 내지르고, 한숨을 토하고,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감동의 눈물따위가 아님을 어린 나이에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온통 공포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것은 공포라기 보다도 차라리 고통이었다. 정신에 융단폭격을 가하는 듯한, 정서를 마구잡이로 쥐어 짜는 듯한 고통.

잭 케첨의 '이웃집 소녀'는 그 시절의 고통스러웠던 공포를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온갖 폭력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소녀를 지켜보는 일은 그야말로 고통 그 자체였다. 직접 폭력을 당하는 것보다 폭력을 지켜보는 일이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때로는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고통의 가장 잔인하면서도 순수한 형태다.

('이웃집 소녀' p8)

 

이 끔찍한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소녀에게 가해졌던 참혹한 폭력과 가해자들의 악마적인 광기가 모두 실제했던 사건이다.

막연히 실화라고만 말해서는, 혹은 몇 줄짜리 기사로만 사건을 접해서는 그 공포와 고통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 시간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 소녀를 마침내 죽음에까지 이르게한 그 기나긴 폭력과 광기의 시간을 보통의 선량한 인간이라면 쉽게 상상하고 그려낼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친절하게 그것을 대신해 준다. 끔찍했고, 끔찍하게 길었던 그 핏빛 시간을 칼로 새기듯 독자의 머리 속에 그려준다. 소녀의 몸과 마음을 참혹하게 긁고 지나간 잔혹한 시간의 자국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체험하게 한다.

그 체험의 시간은 상당히 고통스럽다. 정신을 황폐하게 하고 세상을 끝없이 환멸하고 저주하게 만든다.

읽는 내내 불편했다. 등장 인물 가운데 마음에 드는 이가 단 하나도 없었다(학대당하는 두 소녀는 그저 안쓰러울 뿐이고). 역겨운 인간들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소설 속으로 들어가 가해자와 방관자, 이웃 주민들까지 모조리 기관총으로 쏘아 죽이고 싶었다. 육체가 온통 너덜너덜해지도록 총알을 퍼붓고만 싶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오직 작가가 찍어놓은 활자를 눈으로 쫓아갈 수밖에 없는 독자의 입장이라는 게 답답하고 불편했다. 마음이 불편했고, 그래서 몸도 불편했고, 나중에는 두 눈이 따끔거릴 정도로 그 끔찍한 활자들을 따라가는 게 벅찼다. 악의 심연은 도대체 그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암담한 공포였다. 이정도에서 이제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어둠은 더 깊은 곳으로 내려앉았고, 고통은 더욱 참혹한 모습으로 나를 괴롭혔다. 희망은 없었다. 한 줌의 정의도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 하는 기대감도 어둠의 심연 속에서 여지없이 녹아버렸다. 처절한 절망과 극단으로 치닫는 공포만이 겹겹이 나를 에워쌓다. 제발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그 심연의 마지막 밑바닥으로까지 끝내 곤두박질쳐지고 말았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그 끔찍했던 고통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벗어날 수 없었다.

 

책을 덮어도 가슴은 답답했고, 세상은 온통 지옥의 그림자들로 얼룩덜룩했다.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시신경에 박혀버린 활자들은, 활자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이미지들이 불러낸 참혹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중독된 것처럼 공포는 혈액을 따라 돌면서 문득문득 나를 혐오와 분노, 고통에 사로잡히게 했다. 차라리 이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것은 위험한 책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폭력의 수위를 생각했을 때 19금이 붙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청소년들이 이 책을 봤을 때 정서적으로 어떤 고통과 상처를 입게될 지 근심스럽기도 했다. 심약한 이라면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완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각오와 인내가 필요하다.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신적인 데미지가 분명히 올 것이다. 필시 고통스런 독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일단 다 읽고 나면 절대로,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당연히. 세상을 보는 눈이 적어도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을 대하는 마음도 조금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작가가 그토록 참혹한 소설을 독자에게 기어이 보여주고자 했던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불편한 진실을 또 한 번(혹은 보다 강력하게) 깨우쳐주고자 한 것이다. 세상은 온통 지옥의 그림자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정신적인 데미지를 입은 후에 그 사실을 다시금 인지하고, 깨닫고, 한숨내쉬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분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분노한다고해서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세상을 뒤덮은 그림자는 쉽게 걷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분노하고, 결국 참담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상당히 고통스럽고, 내용 자체도 공포와 충격을 넘어 혐오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라 공포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좋은 평을 주기가 힘들었고, 섣불리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도 없었다. 작가에게 급소를 제대로 한 대 얻어 맞은 듯, 아니면 아주 정신없이 수십차례 린치를 당한 듯한 기분이라 뒷맛이 좋을 수도 없고, 따라붙는 여운도 찜찜할 뿐이다. 피투성이로 죽어간 소녀의 유령이 계속 따라다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지하 밑바닥의 처참한 지옥도를 활자로 생생하게 그려낸 작가의 필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훌륭했고, 어떤 식으로든 독서 전과 후의 정서와 감정에 변화가 초래되고, 현실을 상기하고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소설문학으로서의 기능은 톡톡히 한다. 문제작인 것이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혹은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고자 한 그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진실, 혹은 세상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악의 심연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은 각오가 섰다면 책장을 열기 바란다. 부디 심호흡을 크게하고 고통을 인내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길 바란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그러니까 차곡차곡 쌓이고 쌓이던 불온한 이미지와 위화감들이 지하 어두운 곳에서 최초로 폭발하는 시점이 오면 그때부터는 중도에 책장을 덮기도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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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이라고 말해
우웸 아크판 지음, 김명신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세상에 뿌려진 아이들의 눈물...

 

 

아프리카라고 하면 먼저 남아공 월드컵이라는 축제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사실 그 동안 여러 영상 매체를 통해 소개된 아프리카 관련 프로그램들은 그 곳의 척박한 현실을 담은 것들이었다. 아프리카는 뭔가 배고픈 땅이고, 굶은 죽는 아이들이 속출하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땅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우리와 다른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우리와 다른 땅...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나는 사실 아프리카 관련 대부분의 영상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자선 단체의 시선을 따라가며 펼쳐지는 획일적인 영상을 싫어한다. 그동안 세계의 많은 자선단체들이 아프리카를 방문하여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자선 단체 및 몇 몇 연예인들이 그곳으로 날아가 밥을 퍼주고, 먹을 것들을 선물해주고, 아이들의 비참한 현실에 눈물을 흘리다가 급히 만들어 낸 듯한 미소를 지으며 벌거벗은 현지 아이들과 기념 사진을 찍은 모습이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곤 했다.

나는 그런 영상들이 싫었다. 자선을 하려는 그들의 의도와 목적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하겠지만 나는 다만, 아프리카 관련 방송이 항상 그런 식으로만 제작되어야 한다는 게 불만이었던 것이다. 자선 단체의 시선으로 본 아프리카의 가난은 뭔가 작위적이고 도식화 된 모습이었다. 인간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그저 영상을 위한 피사체같은 느낌만 들었던 것이다.

필시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 다양한 감정과 사연이 있고,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순간순간 소소한 기쁨과 행복도 있을 것이고... 그들도 그들 나름의 수천만가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텐데... 왜 영상물을 통해 보게 되는 그들의 모습은 똑같을까.  왜 모두 똑같은 인생을 사는 것처럼 똑같은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똑같은 슬픔만을 토로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명 연예인은 도저히 못 듣겠다는 듯이 똑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스스로의 삶을 송두리째 반성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그러다가 몇 상자의 선물이 전달되고, 아이들을 위해 축구공이나 책 따위가 선물되고 그것을 받은 아이들이 급히 지은 미소와 함께 유명 연예인이 가운데 자리를 잡고 기념 촬영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일까...

아프리카라는 거대한 대륙에 내려앉은 해묵은 가난의 그림자를 그런 식으로 담아내는 것은 어쩐지 불편했다. 내가 보고 싶은,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가난에 덮여 있지만 그들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의 표정, 각자의 얼굴이 있는 것인데...

 

나는 자선 단체, 유명 연예인의 시선이 아닌 아프리카 현지인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아프리카 땅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것이다.

우리 눈으로 포장된 삶이 아닌, 그들의 눈으로 부딪히고 느끼고 깨달은 '그들의 진짜 삶', '진짜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척박한 땅에서도 울고 웃는 그들만의 인간으로서의(영상에 비쳐지는 피사체로서의 삶이 아닌) 진짜 삶이 있는 것이다.

 

우웸 아크판은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아프리카 현지인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가 그토록 원했던 '아프리카인들의 진짜 삶'이다. 자선 단체 위주의 아프리카 특별 영상물 같은 것은 잊어도 좋다. 영상을 위해 도식화된 삶이 아닌... 가난하지만 그 안에서 갖가지 사연들로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들의 '진짜 삶', '진짜 얼굴'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해왔던 '우리'와 별반 다를게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다. 그동안 봐왔던 영상물들이 불편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마치 별개의 종을 보는 듯 마냥 불쌍하고 슬프게만 바라볼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바라보는 당신의 얼굴, 당신의 삶도 그들과 같을 수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문제는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이라고 말해'가 내게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프리카라는 거대한 대륙의 일상과도 같은 다섯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것은 곧 세계의 일상과도 같은 이야기다.

우웸 아크판은 작가로서의 재능이 출중하다. 그의 문장은 수준급이고 특히 현지의 삶을 카메라로 담듯 생생히 전달하는 묘사력은 놀랍다. 풍경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까지 무섭도록 깊이 꿰뚫고 묘사할 줄 안다. 우웸 아크판이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는 영상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입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며, 무엇보다 인간미가 있다.

 

이 소설집에서 이야기되는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가장 크게 지배하는 두 가지는 가난과 분쟁이다. 그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분쟁으로 인한 갈등에 상처받고 있다.

'크리스마스 성찬'과 '가봉에 가기 위해 살찌우기'는 가난을, '이건 무슨 언어지?', '럭셔리 영구차', '부모님의 침실'은 종교와 이념의 차이로 인한 분쟁과 갈등을 담고 있다.

물론 가난과 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당연히 하층민들이다. 아프리카 땅 전체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그곳에도 부자는 존재하고, 분쟁과는 무관하게 평화롭고 호화로운 삶을 사는 이들도 있다.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통받는 이들은 밑바닥을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또 너무나 당연하지만 아무리 밑바닥의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라지만 그들도 감정이 있고, 희노애락을 느낄 줄 안다. 꿈이 있고 목표가 있다. 식물이나 광물이 아니며 외계인도 아닌 것이다. 우리와 같은 지구인이다. 우리처럼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밥을 먹고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영상물에 비쳐지는 것처럼 하루 종일 찌푸린 인상에 절망적인 표정만 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성찬'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열 두살의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는 중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가난 때문에 포기하고 결국 몸을 팔아 생활비와 동생의 학비를 댄다. 하지만 이 소녀에게도 꿈은 있다. 소녀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동생을 대학까지 보내고 싶어하고 또 스스로를 위해서도 많은 돈을 모으고 싶어 한다. 언젠가는 다시 학교에 갈 날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서는 푼돈이나 버는 지금의 생활에서 벗어나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먼 창녀촌으로 가야만 한다. 소녀는 씩씩하게 말한다. 풀타임으로 일해서 어서 빨리 돈을 벌겠다고.

소녀의 남동생은 큰누나가 풀타임으로 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일은 하더라도 지금처럼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과 함께 지내길 원한다. 무엇보다 소년 자신이 큰누나를 하루 종일 보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 같다. 소년은 큰누나가 자신의 학비를 위해 일한다는 것을 알고 중학교 입학을 포기하려 한다. 수없이 입고 벗어서 낡아진 교복을 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소년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누나는 결국 자신의 커다란 트렁크를 이끌고 집을 떠난다. 가족을 위해 장만해온 크리스마스 음식들만 남겨둔 채.

개인적으로 이 단편이 수록작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었다. 이것은 아프리카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우리 인간들의 이야기였다. 우리가 살아온 70년대 가난의 한 대목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가난은 지금도 존재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린 소녀가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는 결코 낯선 땅의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감동한 것은 그 소녀의 꿈과 누나를 바라보는 동생의 안타까운 시선이 너무도 애틋하고 아름답게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 담긴 현실은 무섭고 비참한 것이지만 누나와 동생의 꿈과 사랑은 너무도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서 안타깝고 안쓰럽고 감동적인 것이다. 무섭고 비참함이 아닌, 그 '아름다움'에서 나는 감동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를 짓누르는 '가난' 그 자체가 아닌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의 '인간'들에게 감동한 것이다.

 

중편 '가봉에 가기 위해 살찌우기'도 가난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두 어린 조카를 가봉의 부잣집으로 팔아 넘기는 삼촌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가난이 그림자 진 곳에서는 횡횡히 벌어지는 '아동 판매'의 실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삼촌은 어린 조카(오빠와 여동생)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새로 얻은 오토바이를 태워주며 가봉이라는 마을로 가면 매일 맛있을 것을 먹고 학교도 다니며 예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다고 한다. 어린 오빠와 여동생은 삼촌을 말을 믿고 어서 가봉으로 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나 삼촌이 숨기고 있었던 것이 서서히 밝혀지면서 아이들의 희망이었던 가봉은 점점 무서운 곳으로 변한다. 뒤늦게 삼촌은 생각을 고쳐먹고 아이들을 가봉에 보내지 않으려 하지만 그럴수록 극도의 위험만이 다가올 뿐이다. 

어딘 줄도 모르고 달나라처럼 먼 곳에 존재하는 가봉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가봉 따위는 어른들의 야비한 입놀림으로 얼마든지 수십 수백 개씩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상의 도시, 꿈의 도시일 수도 있다. 음모와 협잡이 벌어지고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곳은 지금 여기, 아이들이 발 딛고 선 그 자리인 것이다. 어른들은 가봉이라는 실체가 잡히지 않는 꿈의 풍선을 아이들에게 쥐어주며 더러운 이익들을 챙기려 한다. 아이들은 결국 가봉에 가지 못하지만 만약 가봉에 도착하더라도 그들이 꿈꿔왔던 행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무지개처럼 가봉은 아이들의 발걸음에서 더 먼 곳으로 달아날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발 딛고 선 그 곳, 그 자리는 언제나 어른들의 더러운 음모와 협잡과 피와 폭력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또다른 중편 '럭셔리 영구차'는 아프리카 곳곳에서 발생하는 종교 갈등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청년(아직 소년?)은 종교와 이념의 대립으로 인해 형을 잃고 손목 한쪽을 잃고 가족을 잃고 멀리 도망가는 신세가 된다. 이념의 대립은 무서운 것이다. 하나의 사상이 집단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피와 공포를 불러들이게 된다. 딱딱하게 굳어진 사상의 막대는 사냥개처럼 자신과 다른 이념을 찾게 되고, 그 이념이 아직 흐물흐물한 상태일 때 딱딱한 막대로 쳐서 없애 버린다. 이 이야기 역시 아프리카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한반도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념의 대립이 어떤 식으로 상처와 비극을 잉태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우브릴은 다른 종교에 발을 들인 형을 적대시하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형을 심판한다. 그러나 곧이어 마을 사람들은 우브릴조차도 이단으로 몰아세운다. 한 순간이었다. 같은 편이 다른 편이 되고, 그토록 철저히 믿었던 사상이 차갑게 등을 돌리는 순간은... 미처 깨달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진행된다. 돌아서면 우매할 만큼 무섭게 돌변하는 것이 종교고 사상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잔인하고 치사한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실 사상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이 문제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살의를 피해 간신히 도망친 우브릴은 그러나 럭셔리한 버스 안에서 또한번 이념의 대립과 갈등, 분쟁을 경험하게 된다. 그 작은 버스 안도 '인간'들이 모인 이상,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치사하고 잔인한 본성은 그 작은 버스 안을 아프리카의 축소판으로 만들어 버리고, 곧 세계의 축소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온 인간의 비극은 언제나 인간이 모인 곳에서 다시 시작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섬뜩하고 훌륭한 작품이었다.  

 

마지막 수록작인 '부모님의 침실'은 가장 섬뜩하고 무서운 이야기다. 단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3개월동안 80만 명이 야만적으로 살해된 르완다 내전을 배경으로 한 단편이다. 아무 죄도 없고 사상적 대립도 없는데, 다만 핏줄이 다르다는 이유로 선을 긋고 편을 가르고 상대를 적대시하는 종족간의 분쟁을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그린다. 투치족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거행되자 후투족들은 살인귀로 돌변한다. 살아남은 몇몇 투치족 사람들은 부모님의 침실 천장으로 숨어들고... 투치족 어머니와 후투족 아버지를 둔 소녀는 끝내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소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써 부정한다. 어머니가 왜 죽어야만 하는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소녀는 알지 못한다. 왜 어른들이 싸우는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고 함께 산 아버지와 어머니가 왜 적이 되어야만 하는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과 어린 동생은 어느 편에 서야만 하는 것인지... 왜 그들 모두는 한편이 될 수 없는 것인지... 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대립과 갈등은 불가해한 공포일 뿐이다. 

이 단편은 황석영의 장편 '손님'을 연상시켰는데, 우리나라도 이념의 대립으로 종족을 학살했던 끔찍한 역사가 있다. 

 

제목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여기에 실린 다섯 편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들의 문제는 다만 그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대립과 갈등, 전쟁이 끊이지 않는 법이다. 문제를 일으키고, 문제는 가난을 야기하고, 아이들을 고통받게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아닌 땅이라고 해서 이러한 문제들이 비껴가는 것은 아니다. 즉, 그곳에서 '인간'이 살고 있다면 말이다.

 

아프리카의 사람과 그들의 삶을 '아프리카' 특수에 기대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로 그려낸 작가의 성찰에 박수를 보낸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아프리카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땅이니 전세계인들은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세요'라는 낯뜨거운 호소를 하고자 한 게 아닐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누차 얘기했듯 세상 어디에도 인간의 문제는 존재하고, 인간의 문제로 인해 고통받는 아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불쌍한 아프리카 아이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 또 다른 불쌍한 아이들이 바로 당신 곁에서 당신 나라 언어로 도움을 청하고 있음을 인지시켜 주려 했을 것이다. 아프리카인이 아닌, 그저 '인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흡인력 넘치는 필력에 흥미진진하게 읽으면서도 한편 한편 읽을 때마다 진중하게 생각하고 감동할 수 있는 걸작 소설집이었다. 띠지에 적힌 '올해 최고의 책'이라는 말에 자부심을 가질 만한 작품이었다.

오프라 윈프리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은 이라면 누구라도 다른 이에게 추천하고 소개하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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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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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총질을 해대는 인간들...
세상 무서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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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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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의 세계'나 '북극의 눈물' 같은 다큐를 보고 있노라면 종종 서글픈 비애에 사로잡히곤 한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야생 동물들은 결국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거기에서 탐욕이나 이기심, 유희나 여유 같은 것을 찾기는 힘들었다. 오직 생존만이 생의 목표인 듯 보였다. 먹이를 구하고, 서식지를 지키고, 새끼와 자손을 보존하는 일. 이 단순하고 아름다운 일을 위해 언제나 가쁜 숨을 토하며 전력으로 내달리지만 그들의 삶은 처절하기만 했고, 생존의 꿈은 무시로 좌절되곤 했다.  

그들 삶이 처절할 수밖에 없는 중대한 원인 중에 하나가 인간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안다. 다큐가 영상으로, 또 내레이션으로 일일이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만 개입되지 않아도 그들의 삶이 그토록 처절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생존이 그토록 위태롭지도 않을 것이다. 오래전 자연에서 유리된 인간은 자신도 한 때 자연이었다는 것을 잊은 채 자연을 개발과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백수의 왕이라 불리는 세렝게티 초원의 사자 무리.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난 그들은 아무 걱정도, 적수도 없이 제왕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제명까지 살다가는 사자는 별로 없다. 매년 사자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50만 마리가 넘던 사자의 수는 불과 반세기 반에 2만 마리로 떨어졌다. 네발 달린 짐승 중에서는 적수가 없다던 백수의 왕이 멸종 위기에 몰린 것이다. 자연사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사자의 세계에, 사자라는 자연 속에 인간이 무력으로 개입하면서 초래된 비극이다. 매년 사냥총과 마취총, 수많은 살상 무기들을 챙겨들고 사자를 불법, 혹은 '합법적'으로 사냥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날아가는 인간들이 수두룩하다. 도대체 사자 같은 동물을 죽이는 이유가 뭘까.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사자 고기를 먹으려고 그 먼 길을 날아가는 것은 아닐 테다. 그저 과시와 쾌락, 탐욕과 자기만족을 위해 죽이는 것이다.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의 사정이 이 모양이니 다른 연약한 동물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무시로 죽어간다. 이유도 없이, 혹은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고대 원시 사회에서는 생존을 위해,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인간은 다른 동물을 사냥했다. 그때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자연은 건강했고, 지구는 무탈하게 잘 돌아갔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던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자연보다 우위에 올라서려던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됐다. 생존을 위한 사냥이 과시와 쾌락을 위한 놀이로 바뀌고, 인간은 자연과의 공존을 거부한 채 마음대로 파괴하고 변형시켰다. 지구는 병들어 갔다.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었다. 자연의 적이고, 자연을 병들게 하는 병균, 암덩어리에 불과했다. 몸속에 깃든 병균을 박멸하기 위해 자연이, 지구가 이제 행동에 나설 때도 된 것이다. 지금처럼 계속 가다가는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이라는 종이 자연에 의해 흔적도 없이 몰살당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 


일 년에 반이 겨울인 외딴 산골 마을에서 연쇄 살인이 발생한다. 첫 번째 사망자는 사고사로 보였으나 이어서 발생한 두 번째 사망 사건은 확실히 살인처럼 보였다. 첫 번째도 살인일 수 있다는 의심이 대두되고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 주려는 듯 세 번째, 네 번째 살인이 연이어 발생한다. 짐승 포획을 즐기는 이웃 사내, 경찰관, 목사 등 죽은 이들의 면면은 제각각이며 서로 간에 연관성도 찾기 힘들다. 그러나 전직 교사이자 저택 관리인으로 일하는 듀세이코는 자신의 특기인 점성술에 근거하여 죽은 이들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찾아낸다. 시신 주변에서 발견된 동물 발자국, 동물 박제, 시신을 발견하기 직전 마주한 동물의 눈동자, 사슴 무리, 그리고 죽은 이들 모두 사냥을 즐겼다는 단서 등을 토대로 듀세이코는 주장한다. 죽은 사람은 모두 야생 동물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라고. 죄 없는 동물을 그저 재미 삼아, 과시하기 위해, 합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당당하게 죽여온 죄인들에게 동물이 단죄를 내린 것이라고. 듀세이코의 주장은 무시되고, 모두들 그녀를 정신 나간 노파로 여긴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시신이 발견된다. 듀세이코의 말처럼 시신 주위에는 여전히 흩어진 동물 발자국이 있고, 죽은 이는 역시 사냥을 즐겼던 사람이다. 정말로 인간에 대한 동물의 무시무시한 앙갚음이 시작되는 것일까. 아니면 자연을 멋대로 훼손하고 도륙한 인간에게 내리는 신의 심판일까


올가 토카르추크는 문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문학의 기능이고 책임이라 생각한다. 문학뿐만 아니다. 세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사람들은 제각각의 위치해서 제각각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잘못을 지적하고, 반성하고, 고쳐나가야만 할 것이다. 작가는 글로 말한다. 

끝도 없이 자연을 훼손하고 생태를 파괴하는 인간의 무지하고 잔혹한 행위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던 작가는 글을 통해 분연히 외친다. 더 이상 죄 없는 동물을 죽이지 말라고. 자연을 파괴하지 말라고. 동물은 곧 자연이고,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오늘 사슴 한 마리를 아무 이유 없이 죽이는 일은 내일 내 자식을 죽이는 일이고, 훗날 내 자손을 멸하는 일과도 같다. 당신이 겨눈 총부리가 종국에는 누구의 가슴을 향하는지, 열등과 탐욕과 이기심으로 얼룩진 근시안에서 벗어나 보다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작가는 충고한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던 시절을 기억하라고. 동물을 비롯한 모든 지구 생명체와 동등한 위치에서, 그들의 동반자로 살아가던 시절로 회귀하라고.

이 작품의 주제와 상통하는 세계관을 지닌 일본 작가 이사카 고타로의 '중력 삐에로'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하루는 이런 말을 한다. 개를 장난으로 죽이는 건 사형입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어요.

개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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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돼지의 눈
제시카 앤서니 지음, 최지원 옮김 / 청미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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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변치 않는 본성, 변치 않는 과오, 변치 않는 역사. 표지만큼이나 강렬한 내용이 담긴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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