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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이런 백수라니...
번듯한 대학까지 나와서 나이 스물 여덟이 되도록 번듯한 직장하나 구하지 못하고(아니 구하지 않고) 아버지 집에서 당당히 기거하며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책을 사고, 읽는 일 뿐이다.
아니 책만 읽는 것이 아니다.
연애도 하고, 여행도 다닌다.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친구의 가게를 맡아 줄 만큼 나름 여유 넘치는 삶을 살아간다. 책만 읽는 삶이 아니라, 저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하는 삶인 것이다.
백수인 서연은 이렇게 말한다. 책만 읽어도 시간이 모라라는 판인데.. 일까지 할 시간이 어디 있냐고...
다시 말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도 인생은 짧다는 거다. 인생은 짧고, 짧은 만큼 소중한 것이니 하고 싶은 일만 열심히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거다. 맞는 말이다.
누군들 그걸 모르나. 누군들 그렇게 살고 싶지 않나?
근데 문제는 그렇게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가,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싶다, 영화를 보고 싶다, 연애를 하고 싶다, 파티를 하고 싶다, 그냥 맘대로 놀고 싶다, 이런 것들만 하면서 살고싶다...
하는 따위의 바램들은 그저 밑바닥에서 꿈꾸고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이 밑바닥에서 실현되기에는 잡초처럼 거치적거리는 문제들이 너무 많다. 즉 삶을 탄탄하게 유지할 수 있는 기초공사가 끝난 후에나 생각할 문제라는 것이다.
삶에 어느 정도의 풍요(로 인한 여유)로움이 깃들 때 비로소 진정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을런지... 를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최고 풍요도를 레벨 100으로 잡았을 때,
최소한 레벨 30정도는 되어야 그런 바램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최소한 레벨 50정도는 되어야 그런 바램을 실현할 엄두가 날 것이다. 레벨 10, 혹은 그것도 안되는 삶이라면, 다시말해 거지에 가까운 삶이라면, 일단 먹고 사는 게 급박할 것이다.
그러면 서연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거지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원하는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마음가짐의 문제지, 물질적인 조건들에 좌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어쩌면 이것이 이 소설의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얽매이지 말고 꿈을 향해 용감히 나아가라.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지나기 전에 해 버려라. 그래서 후회없는 삶을 살아라.
하지만 정말로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꿈을 향해서만 전진할 수 있을까...?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현실의 문제들 따위는 능히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일까...?
서연이 만일 중소기업 수준의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가 없는 천애고아 거지였다면 그녀의 백수 생활이 이다지도 순탄하고 멋있을 수 있을까...
서연에게 있어 아버지는 서연의 삶을 단숨에 레벨 70정도로 끌어올려준 존재, 다시말해 물질적인 가치를 끊임없이 추구해 온 존재인 것이다.
서연이 하고 싶은 일들만 하는 동안, 서연이 하기 싫어 했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다른 일들을 아버지가 대신 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서연은 거지 같은 생활을 하지 않는 당당한 백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본다.
책만 읽고 사는 삶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책만 읽고 살 수 있는 서연의 여유가 부러운 것이다.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삶의 밑바닥에 근접해 있는 자질구레한 문제들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부러운 것이다.
의식주 걱정이 없는,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 필요없는,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심지어는 죽기 전까지도 지금의 여유가 보장될 것 같은 그런 삶이라면,
그 안에서 얼마든지 백수 노릇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그리 큰 부자가 되는 것도 필요없다. 그저 먹고 살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정도의 여유만 유지될 수 있다면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도 인생은 짧은 것이다' 라는 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제 1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임영태의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나 손창섭의 단편 '혈서'등 백수를 다룬 여타의 소설들에 비해 '백수생활백서'가 공감과 감동이 다소 떨어지는 이유는 아마도 현실과의 거리감에 있는 것 같다. 서연의 행동은 언뜻 오늘날 백수의 일상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 같지만 기실 진짜 백수들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현실 속에서 밑바닥을 살아가는 백수들의 삶이란 서연의 삶처럼 당당하지도, 깔끔하지도, 멋있지도 않다. '백수생활백서'는 마치 현실을 다루고 있는 듯 하지만 어쩌면 판타지를 다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이것은 백수의 현실이 아니라, 백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판타지의 일종일 것이다. (서연, 유희, 채린, 경...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다분히 로멘틱, 혹은 판타스틱하다)
아냐 이게 아닌데... 진짜 백수의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닌데... 왜 자꾸만 소설에서, 영화에서 이런 백수의 삶이 등장하는 것일까... 현실을 잠시 잊고 판타지에 젖어 보라는 것인가... 판타지는 누구나 좋아한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좋아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판타지에서 깨어나면 현실은 더욱 무겁고 무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