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의 철학 - 미루는 본성을 부정하지 않고 필요한 일만 룰루랄라 제때 해내기 위한 조언
카트린 파시히.사샤 로보 지음, 배명자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는 내내 동화 '개미와 베짱이'가 떠올랐다. 하루종일 열심히 일만 하는 개미와 그 곁에서 노래만 하면서 놀고 있는 베짱이. 과연 누구의 삶이 더 행복했을까.

물론 어려서 읽은 이 동화의 승리자는 개미라고 알고 있다. 겨울이 오자 열심히 일했던 개미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지만 놀기만 했던 베짱이는 춥고 배고픈 겨울을 보내고 후회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전쟁후 배고픈 서러움을 경험했던 베이비붐세대의 우리들은 그저 부지런해야 살 수 있다고 배웠다.

선택이 아닌 필수! 몸으로라도 가난을 넘어서야 배고픔을 해결한다는 절대절명의 명제앞에서 게으름은 치욕이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이렇게 일어섰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무계획이라는 말 자체가 이해되기 힘들다. 하루를 24시간보다 더 늘여 쪼게 써야하는 세대에서 보면 무계획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제목에 '무계획'옆에 철학이라는 훈장을 붙인 저자의 의도가 너무 궁금해진다.

 


 

우리 세대에서는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았던 '느림의 미학'이 추구되는 요즘에서 보면 과연 빠르고 계획적인 삶만이 정당하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돌아보게 된다.

지금도 내 책상위에는 스케줄이 빡빡히 채워진 달력이 놓여있다. 직장은 이미 퇴직을 했고 그저 무위도식하는 내게도 무계획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날 잠들기 전에 다음 날 치워야 할 일들을 확인하고 하다못해 공과금 내는 날이며 책을 읽어야 하는 스케줄까지 빡빡하게 적혀있다.

때로는 이런 삶이 너무 목을 조이는 것이 아닌가 돌아볼 때도 있지만 살아온 습관이 일상이 되어버려 미션을 완성한 후의 희열까지 느끼곤 한다.

 


 

일단 저자가 정의하는 일, 즉 노동에는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는 노동과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수행해야하는 '개뿔노동'으로 분류시켜놓은 것이 재미있었다. 하긴 먹고 살아야하니까 일하는 사람이 즐기면서 일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말하자면 '개뿔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개뿔노동'도 상황을 개선시켜 조금은 즐거운 마음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노동이 혹은 일들이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하는 것. 바로 이런 점을 깨달아야 '개뿔노동'도 의미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 포 를 해야하는가. 우리는 너무 늦게 결정해서 오는 실패를 수없이 겪어왔다.

혹은 너무 일찍 포기해서 오는 절망도 맛보았었다. 역사적으로 이런 우여곡절은 너무도 많았었고 때로는 인류의 역사를 다시 쓰는 커다란 의미가 되기도 했었다. 문제는 너무 일찍 중단된 프로젝트가 혹시 계속 진행되었더라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 확인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포기의 순간이 도래하면 현명하게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제언이 참 마음에 든다.

누구에게 미루지 말고 책임을 인정한다든지 절대 거짓말로 상황을 윤색하게 만들지 말라는 등에 조언은 비록 포기의 치욕은 있지만 비겁하지 않을 수 있는 배려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들의 이런 조언은 죄책감과 후회로 고통받을 사람들에게 묘한 치유감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일을 계획적으로 하는 사람인지 무계획적으로 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계획적인 인간이라고 판명이 난다면 계획적인 인간이 될 수는 있을까? 특히 게으른 누구에겐가는 성실하고 인내하는 법이 필요하다.

'간단한 예비훈련 다섯 가지'를 통해 정말 간단히 무계획적이고 불성실한 삶을 전환시킬 수도 있다.

신문을 낱장으로 분리해 한 장씩 폐지함에 넣기라든가,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속도감을 익히는 등 간단하게 훈련을 해볼 수 있다.

 


 

어수선한 일상을 정리하고 계획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아주 꼼꼼한 것까지 조언한다.

모든 계약을 인터넷으로 정리하고 회비가 나가는 회원목록을 정리해서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라는 항목까지 있다.

물론 이런 정리정돈이 무계획적이고 방만한 삶을 치밀하게 유지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지만 '무계획적인 삶'이 결코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적당히 힘을 빼고 절반의 힘으로 효율을 높힌다든지 '내려놓기'와 '내버려두기'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에도 큰 도움을

준다. 과연 계획적이고 치밀한 삶만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쓸것인가. 아니면 적당히 쓸것인가. 그건 바로 우리 자신의 선택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냐는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인 셈이다.

어떤 삶을 선택하든 죄책감없이 극복하는 해법이 녹아있는 여유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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