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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배수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인간의 숨결이 닿기전 빙하기에 독일의 북쪽에 떠내려온 얼음이 녹아 형성된 호수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백여 년전만 해도 어느 농부가족의 소유였던 호숫가 땅은 부유한 베를린
사람들에게 나뉘어 팔리고 한건축가에 의해 오두막이 지어졌다.
그땅을 산 주인들 중에는 나치 치하의 독일에 살던 유대인 섬유업자가족도 포함되었는데
독일의 반유대정책에 밀려 망명의 길을 떠나거나 아우슈비츠로 사라졌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분명 예전에 누군가가 살았던 곳이었을 것이고 더 올라가보면
조선시대와 고려시대 그리고 삼국시대를 넘어 '집'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짓고 살았던 조상들의
집터였을것이다.. 아마 동굴처럼 천연의 것이 아니었다면 움집정도였겠지만.
일단 특이한 소재를 역사의 아픔과 버무려낸 작가의 안목이 놀랍다.
점점 사라져가는 북촌의 한옥집을 바라보면 조선시대 당쟁의 회오리에 휩쓸려 피고 졌던
양반들이 떠오르고 6.25의 전화속에서 살아남아 이렇게 과거의 숨결을 전해주는 것이 문득
고마웠던 기억이 있다. 사람은 떠나도 집은 남았다.
중국의 고도의 한도시는 지하 몇층아래에 과거의 성들이 묻혀있다고 했던가.
극심한 수해로 묻히고 그위에 다시 성을 쌓고 다시 묻히는 시간들이 지난후 과거의 번성과 멸망을
숨긴채 저자가 제3의 피부라고 말했던 '집'이 발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는것이다.
독일과 우리는 분단국이었던것으로 닮은 나라이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로서 아리아인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싶었던 오만함은 우리와 다르지만
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분단의 아픔과 상처투성이의 역사는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과 오두막을 짓고 알콩달콩 살기를 원했건만 삶이란 내가 생각한대로
살아지지 않는법. 사랑의 보금자리였던 '집'은 침략자들의 숙소가 되고 사랑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보금자리는 놓아둔채 떠나버렸다. 자신의 손으로 지은 그집은 가져갈 수
없었으므로...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고향이 될 것임을 믿으면서.
누구나 그러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번성하여 더 넓히고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집'을
생각하며 벽을 쌓고 지붕을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곳에서 평생을 마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동베를린 출신의 작가가 호숫가 근처의 오두막이 만들어지고 소멸되는 시간동안 시간이 할퀴고간
아픔과 태어나고 사라졌던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독일이 겪었던 아픔을 그려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조상들이 걸어왔던 아픔역사와 학살의 모습까지도 솔직하게 그려낸 용기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부모가 죽고 마지막 처형의 순간에 끌려가는 유대인소녀의 모습에서
가슴이 저려온다. 가뜩이나 어수선한 요즘 전쟁의 비참함이 다시는 이나라를 할퀴고 가지 않기를..
저 문밖에 있는 수많은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체온으로 따뜻해지고 오늘 하루 고단했던
몸을 뉘여 달콤한 단잠에 빠지는 그런 오두막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