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은 탐정의 부재
샤센도 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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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갑자기 발생한 천사의 '강림'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하늘을 가르며 내려온 빛줄기에서 천사들이 튀어나왔고, 그들은 살육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땅속 지옥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러한 일은 세계 각지에서 동시에 일어났고, 한 명은 죽여도 괜찮지만 두 명 이상 죽인 자는 빠짐없이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강림 이전에 저지른 죄는 심판받지 않았으므로, 이전의 흉악 무도한 연쇄 살인범들은 살인을 멈춘 채 지옥에도 떨어지지 않고 아무런 벌도 받지 않은 채 숨죽이며 평화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천사들의 모습은 인간의 상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날개는 있었지만 깃털이 전혀 없고 거무죽죽한 혈관이 불거져 보이는 것이 박쥐 날개와 비슷했으며 몸통 또한 잿빛으로 팔다리가 이상하게 길쭉했다. 눈코입이 존재하지 않는 얼굴은 표면에 아무것도 비치지도 않고 빛조차 반사되지 않았을뿐더러 아무런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그 모습은 자칫하면 악마가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들 이 생물을 '천사'라고 불렀다. 천사일 리 없다고 화내던 이들도 실제 그들과 마주하고 나면 천사라고 인정하고 불렀다.


그러한 천사들은 죄를 지은 인간들을 지옥에 떨어뜨릴 때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건만 죄 없는 인간 앞에서는 어이없을 정도로 약했다. 그리하여 평소 하늘을 해파리처럼 부유하는 천사를 붙잡는 것은 너무 쉬웠다.

인간들은 천사를 붙잡아 연구를 했다. 그리고 인간의 호기심은 연구를 넘어 천사를 죽여봤다. 처음 천사를 죽일 때는 그 사람 주위로 아무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을 죽이고 두 번을 죽이고 또 죽여도 그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두 마리 이상의 천사를 죽여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


아오기시는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아닌 죽은 예전 동료들을 위해서다. 아니, 사실 천국이 있다면 정의의 사도를 꿈꾸던 그들도 보답을 받겠지만 아오기시 자신이 구원받을 거라 생각했다.

지옥이 있는 것은 보았지만 천국이 있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예전 아오기시 탐정 사무소의 동료 아카기 스바루는 납치 사건의 피해자로 아오기시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적하여 찾아낸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후 아카기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아오기시를 동경하며 정의의 사도가 되고자 아오기시의 탐정 사무소에 조수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채용을 반대했던 아오기시였지만 그의 순수하고 솔직한 모습에 함께 일하기로 했고, 그 후 아카기가 스카우트한 인재들과 그가 형성한 다양한 인맥 덕분에 아오기시의 탐정 활동은 폭이 넓어졌고 예전보다 이름을 알리며 사무소도 커졌다.


그러나 그렇게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세상 한구석에서 노력하던 동료들은 죽임을 당했다. 천사의 강림 이후 등장한 이상한 논리 때문이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한 명까지 죽일 수 있다면 죽이는 게 이득이다. 그것은 신이 용납한 살인이다.

또 두 명을 죽이고 지옥에 갈 바에야 한꺼번에 많이 죽여 길동무로 삼는 것이 낫다.

정신 나간 생각이지만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대규모 무차별 살인사건을 일으켰고, 아오기시 탐정 사무소의 정의의 사도들은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

그날 아오기시도 죽었다.


그런 아오기시에게 천사의 섬으로 유명한 도코요지마섬의 주인 쓰네키 오가이가 섬으로 초대를 했다. 오면 아오기시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아오기시는 섬에 왔고, 그날 저녁 쓰네키는 섬에 온 손님들을 이끌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쓰네키는 특별 이벤트로 자신이 모셔둔 천사를 손님들에게 공개했다. 그 천사는 지금껏 알고 있던 천사와 달랐다. 우는 것 같기도,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목소리를 내는 천사는 모든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아오기시는 그 천사에게 팔을 붙잡히고는 정신을 잃고 만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섬의 요리사 오쓰키가 아오기시를 깨우러 왔다. 그리고 쓰네키가 살해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는데…….



처음 접해보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 소설이다.

작가는 현실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생김새가 으스스하고 섬뜩한 천사 같지 않은 '천사의 강림'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설정하고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규칙을 제시하여 호기심을 유발하고 있다.

사람을 두 명 이상 살해한 자는 천사가 지옥으로 심판한다.

얼핏 보면 살인을 예방하는 것 같지만 한 명까지는 죽여도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살인을 용납하는 신이라니.

이에 사람들은 그 용납된 기회를 쓰는 게 낫다는 사고방식을 정립한다.

읽으면서 과연 천사 강림은 세상을 낙원으로 만든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세상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런데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천사의 강림 후 생겨난 세계의 법칙 하에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이에 천사의 강림 후 계속해서 탐정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회의적이던 아오기시는 깨달음을 얻는다.

천사가 있든 없든 탐정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천사가 없을 때는 사법부가 범인을 심판했지만 천사가 강림하고는 천사가 범인을 심판한다. 다만 사법이 천사로 교체되었을 뿐 탐정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탐정의 역할은 무엇일까?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천사의 역할이라면 탐정의 역할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 아닐까.


이 소설은 천사의 강림이라는 특이하고 특수한 상황 속에서 연쇄 살인 사건을 해결하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탐정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일반 현실 세계에서의 추리보다 더 심오하고 복잡하여 독자들에게 생각과 추리의 재미를 배가시켜주고 있다.

처음에는 현실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을 법한 설정이어서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이었으나, 읽을수록 오히려 상상력의 날개를 마음껏 펼칠 수 있어 더욱 빠져들 수 있는 추리소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이 끝나 갈수록 책을 덮고 싶지 않고 이야기가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강하게 드는 소설이었다.

혹시 아오기시의 다음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살짝 기대해 본다.


그리고 아오기시는 그토록 알고자 했던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해답을 찾았을까?

대답은 소설 속에 나와 있다.

『낙원은 탐정의 부재』의 천사 강림 후 세상으로 다 같이 여행을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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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여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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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여인>은 처음에는 화자의 이야기로 진행되다가 화자가 '회색 여인'이라 불린 '아나 셰러'의 편지를 건네받고는 그 편지의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다.

네카어 강가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 나 역시 그곳에 친구 몇 명과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주문한 커피와 쿠헨과 시나몬 케이크를 거의 다 먹어갈 무렵 하늘에서 갑작스레 굵은 비가 떨어졌다. 친절한 사장은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정원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집안으로 들였고, 셰러 씨와 오래 알고 지낸 내 친구가 셰러 부인을 보러 내실로 가자고 했다. 내실에서 친구가 셰러 부인과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방을 둘러보았고 시선을 끄는 여인의 그림을 발견하고는 그녀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셰러 부인은 그녀가 셰러 씨의 대고모 '아나 셰러'임을 알려주며 그녀가 공포로 얼굴색을 완전히 잃어 '회색 여인'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자세한 것은 모른다며 자신의 남편에게 물어보라고 하여 셰러 씨에게 물어보니, 셰러 씨는 대고모가 자신의 딸에게 쓴 편지를 나와 친구에게 빌려주었다.

편지에는 아나가 자신의 사랑하는 딸 우르줄라와 앙리와의 결혼을 반대함으로써 딸이 자신에게 퍼부은 원망의 말에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가 적혀 있는데….


<마녀 로이스>는 1692년 미국 보스턴 근교의 세일럼에서 실제 발생한 마녀재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로이스의 아버지 바클리 목사는 열병으로 이미 돌아가셨고 이제는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려고 했다. 어머니는 로이스에게 바퍼드에 남지 말고 미국의 뉴잉글랜드 세일럼에 사는 자신의 남동생 랠프 힉슨을 찾아가서 몸을 의지할 것을 바랐다. 바퍼드에는 로이스를 기꺼이 맡아줄 사람도 있고, 자신을 사랑하는 휴 루시가 있음에도 로이스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른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 홀더니스 선장의 도움으로 미국에 있는 외삼촌 집에 도착한 로이스는 아파서 누워있는 외삼촌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외숙모 그레이스는 로이스가 세일럼에 온 때부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나마 나이가 비슷한 사촌 페이스와 친하게 지냈지만 페이스는 개인적인 이유로 우울해하는 시간이 많았다. 갈수록 증상이 심해져 그런 페이스를 위로하기 위해 로이스가 밤에 침대에 누워 영국의 관습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며 핼러윈에 했던 장난들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자는 줄로만 알았던 사촌 프루던스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비명을 지르며 로이스가 핼러윈에 했던 놀이를 언급하며 로이스에게 악마가 있다고 외숙모에게 언급하는데….


<늙은 보모 이야기>에서는 늙은 보모 헤스터가 아씨에게 오래전 아씨의 어머니 로저먼드 아가씨가 태어날 때부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평화롭고 행복했던 아가씨의 집안은 아가씨가 네다섯 살 무렵, 아가씨 어머니의 부모님이 2주 간격으로 차례로 돌아가시며 불행이 시작된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아가씨의 아버지도 열병으로 죽고 말지만, 둘째를 임신하고 있던 아가씨의 어머니는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며 겨우 버틴다. 하지만 둘째 아이마저 죽자 결국 어머니도 죽음에 이르렀고, 어린 로저먼드 아가씨와 보모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노섬벌랜드에 있는 퍼니벌 대저택으로 가게 되는데….



<회색 여인>에서는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에 따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투렐과 결혼하게 된 아나가 남편 투렐의 겉모습과 다른 실제 모습을 발견하고는 두려움을 누르고 하녀이자 남편 역할을 하게 되는 아망테와 도망을 치며 살아남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도망 과정 중에 드러나는 아나와 아망테의 동성애와 진정한 사랑과 희생.

그리고 아나가 '회색 여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

마지막에 아나가 딸의 결혼을 반대한 이유와 그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충격으로 숨이 턱 멎는 듯했다.


<마녀 로이스>는 실제 마녀재판의 상황을 그대로 소설에 옮겨와 보여줌으로써 그 소동이 실제 마녀를 처단한 사건이 아닌 개개인의 이해관계에 의해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처리하는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집단 광기로 발전해 힘없는 여성들이나 인디언, 비주류 종교인 등 엄청난 수의 무고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주인공 로이스 역시 영국에서 건너온 이교도에다가 외삼촌 가족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그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해 사촌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무고하게 희생된다.

"그들이 아무리 회개한들 로이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고 로이스를 살려낼 수도 없습니다."라는 휴 루시의 말은 소설을 읽는 동안 참고 있던 눈물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울컥하며 치밀어 오르는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으로 인해 소설을 끝내고도 한동안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늙은 보모 이야기>는 고딕소설의 전형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령과 대저택이라는 한정된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가족의 비밀.

눈보라치는 계절로 인해 으스스함은 절정에 달하고 그 끝에 드러난 진실은 더욱 충격적이고 오싹함을 안겨주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작품들은 오래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상황과 처우에 대한 인식을 달리할 것을 목소리 내고 있다. 그리고 유령과 공포 이야기로 대변되는 고딕소설 속에서 목소리를 내어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여인들을 통해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 속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힘없는 여성들의 삶과 사회가 그들의 삶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조금은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다음 시즌에는 '휴머니스트'에서 어떤 주제의 고전소설을 출판할지 너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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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식당 3 : 약속 식당 특서 청소년문학 25
박현숙 지음 / 특별한서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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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게를 먹으면 완전 죽어요. 가려워서 죽는다고요. 입천장까지 긁어야 한다고요. 재료 설명할 때도 게는 들어가지 않았었는데,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은근슬쩍 발뺌하지 마시지요.

p.115



채우는 처음 식당을 열었을 때 찾아왔던 남자아이 구동찬의 누나가 공터에서 맞고 있던 고동미라고 생각해서 누나에게 맛있는 것을 만들어 줄 테니 식당에 오라는 말을 전하라고 했다.

그런데 고동미는 다른 연유로 식당에 들렀고 그때까지 고동미가 구동찬의 누나라고 믿고 있던 채우는 공짜로 맛난 음식을 만들어 준다. 뒤이어 고동미를 때리고 있던 구주미가 자신을 왜 오라고 했냐며 식당에 들어오자, 채우는 폭력적이고 싸가지없는 구주미에게 반감을 드러내며 자신은 오라고 한 적 없다며 식당에 왔으니 음식이나 시키라고 한다. 그러고는 음식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구주미에게 재료와 조리과정에 대해 대충 설명을 해주는데….


구주미가 고동미를 꿇어 앉히고 주먹을 치켜들고 있는 것을 채우가 봤는데도 구주미가 자신은 힘없는 아이를 두들겨 패고 돈을 뺏은 적 없다고 화를 내는 것을 보니 혹시 무슨 오해가 있는 걸까? 아니면 구주미가 모르쇠로 일관하는 정말 나쁜 아이인 걸까?

그리고 구주미가 게 알레르기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니 혹시 구주미가 설이? 아니, 고동미도 갑자기 게 알레르기? 그러면 게 알레르기는 없는 것 같지만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왕 원장은?

고동찬도 자꾸 불쑥불쑥 나타나는 게 무언가 정체가 의심 가고.

이야기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재미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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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목소리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
버넌 리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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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단편 <유령 연인>에서는 이야기 화자인 화가가 3년 전 켄트의 소지주 부부의 초상화를 그려주기 위해 오크허스트에 머물렀을 때,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을 직접 목격했고 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오크 부인은 화자인 화가의 그림을 왕립 예술원에서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뒤 자신들 부부의 초상화를 남편 오크 씨를 통해 의뢰한다. 당시 화자는 화가로서 시련을 겪고 있던 때라 그들의 의뢰를 수락했지만 이내 흥미로운 구석이 없을 것 같은 켄트 소지주 부부의 초상화를 여름 한 철 동안 그릴 것을 생각하며 끔찍해하고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크허스트의 저택에서 만난 오크 부인은 화자가 예상했던 바와 달리 존재 자체로 너무나 완전했고, 화자가 평생 본 여인 중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은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는 희귀하고 아름다운 초상화 모델이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독특하고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며 남편의 초상화부터 그리면서 그 집에 묵은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화자는 저택의 홀에 걸린 오크 가문 조상의 초상화 속의 한 귀부인과 오크 부인이 이름과 외형이 완전히 닮아 있음을 발견하는데….


<끈질긴 사랑>은 스피리디온 트렙카라는 인물의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스피리디온 트렙카는 현학과 예술 비평으로 가득한 저서를 써 현장 탐사 연구비를 받아 또 다른 저서를 쓰기 위해 이탈리아의 우르바니아로 오게 되었다. 그는 우르바니아로 오기 전부터 괄테리오와 데상크티스 신부가 쓴 우르바니아 역사에 등장했던 여인 메데아 다 카르피에 마음이 끌렸고, 우르바니아에 온 초기 며칠 동안을 제외하고는 이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메데아 다 카르피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익명의 고서에 의하면 메데아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명랑하고 호감 가는 태도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야망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그녀는 열네 살에 대리 결혼한 잔프란체스코 피코라는 열여덟 살의 미소년 신랑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을 시작으로 스물일곱이 못 되는 짧은 생애 동안 다섯 명의 연인을 파국으로 몰아넣으며 악명을 떨치는데….


세 번째 단편 <사악한 목소리>는 바그너를 추종하여 그 스타일을 완벽하게 모방해 북유럽 설화를 주제로 한 '덴마크인 오지에'라는 오페라를 작곡하려는 작곡가 망누스의 이야기이다.

예술가들의 하숙집에 묵었던 시절, 하루는 하숙집에 살던 모두가 모여 어느 미국인 화가가 망누스에게 사다 준 '차피리노'라는 별명을 갖게 된 18세기 가수 발타사르 체사리의 초상화를 보았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궁금해하자 망누스는 그가 멍청하고 사악한 목소리의 노예이자 경멸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가 망누스에게 차피리노의 애창곡을 신청했지만 망누스는 거절했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에 망누스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며 오페라 '덴마크인 오지에'를 작곡하려 했지만, 다시 대화가 이어지며 이번에는 알비세 백작이 자신이 아는 가수 차피리노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는데….



『사악한 목소리』는 전혀 새로운 존재에 의해 눈에 보이는 공포와 위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익숙하고 잘 아는 세상과 진실이라고 느끼는 것에 어느덧 서서히 낯선 그림자가 드리워져 그것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두려운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이미 친숙하고 잘 아는 것에 어느 순간 전혀 다른 본성이 덧입혀져 그 대상이 이전에 내가 알던 친숙한 것이 아님을 느끼는 순간, 그것은 친숙하지만 낯설고 두려운 전혀 다른 위험과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편하고 아늑했던 대상과 공간이 어느새 불편하고 불쾌한 것으로 바뀌어져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내면이 분열하여 무너져가며 공포를 유발한다.


<유령 연인>, <끈질긴 사랑>, <사악한 목소리> 전부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를 읽어가던 어느 순간 초자연적이고 이상하고 섬뜩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고, 그것을 뿌리칠래도 끈질기게 우리의 인식에 들러붙어 감정을 고조시키며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과연 진실인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과연 실재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만다.

물론 <사악한 목소리>에서는 여성적인 것을 혐오하고 부정하고 지우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매혹되는 남성 작곡가의 애증의 이야기 속에 드러난 페미니즘적 요소도 있기는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시화된 직접적 공포를 볼 수는 없었으나,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드는 인식의 불안과 강박으로 인해 실재와 허구를 구분할 수 없는 붕괴된 의식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읽는 내내 숨 막히는 공포를 조성하고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버넌 리의 『사악한 목소리』를 읽고 그녀가 추구한 이야기 세계의 낯익음 속에서의 낯섦으로 인해 아는 만큼 두려움을 일으키는 공포의 미학에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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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여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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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보모 이야기>


우리 마님과 저는 둘째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 비에 젖은 채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리가 그만 열병에 걸려 돌아가시고 말았지요. 마님은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로 기진맥진했지만, 새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 악착같이 버텼어요. 하지만 그 아이마저 죽고 말았지요. 마님은 죽은 아이를 가슴에 묻고 시난고난 메말라갔어요.

p.238



늙은 보모가 아씨에게 오래전 아씨의 어머니가 태어날 때부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평화롭고 행복할 것만 같은 아씨의 집안에 아씨가 네다섯 살 무렵, 외조부모가 2주 간격으로 차례로 돌아가시며 불행이 찾아온다. 그때 아씨의 어머니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던 터라 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마침 긴 여행에서 돌아온 아씨의 아버지마저 열병으로 죽고 만다. 이에 어머니는 뱃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 악착같이 버티지만 아이마저 죽고 나니 결국 어머니도 죽음에 이르렀고, 어린 아씨와 보모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노섬벌랜드에 있는 퍼니벌 대저택으로 가게 되었는데….


아가씨가 살게 된 고모할머니 퍼니벌 부인의 대저택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아가씨가 보았다는 어린 소녀의 정체는 무엇이기에 눈 위에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그 어린 소녀는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순진무구한 아가씨를 추운 바깥으로 꾀어내 차가운 눈 속에 버려둔 걸까?

그것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보모는 아가씨를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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