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목소리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
버넌 리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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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단편 <유령 연인>에서는 이야기 화자인 화가가 3년 전 켄트의 소지주 부부의 초상화를 그려주기 위해 오크허스트에 머물렀을 때,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을 직접 목격했고 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오크 부인은 화자인 화가의 그림을 왕립 예술원에서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뒤 자신들 부부의 초상화를 남편 오크 씨를 통해 의뢰한다. 당시 화자는 화가로서 시련을 겪고 있던 때라 그들의 의뢰를 수락했지만 이내 흥미로운 구석이 없을 것 같은 켄트 소지주 부부의 초상화를 여름 한 철 동안 그릴 것을 생각하며 끔찍해하고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크허스트의 저택에서 만난 오크 부인은 화자가 예상했던 바와 달리 존재 자체로 너무나 완전했고, 화자가 평생 본 여인 중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은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는 희귀하고 아름다운 초상화 모델이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독특하고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며 남편의 초상화부터 그리면서 그 집에 묵은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화자는 저택의 홀에 걸린 오크 가문 조상의 초상화 속의 한 귀부인과 오크 부인이 이름과 외형이 완전히 닮아 있음을 발견하는데….


<끈질긴 사랑>은 스피리디온 트렙카라는 인물의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스피리디온 트렙카는 현학과 예술 비평으로 가득한 저서를 써 현장 탐사 연구비를 받아 또 다른 저서를 쓰기 위해 이탈리아의 우르바니아로 오게 되었다. 그는 우르바니아로 오기 전부터 괄테리오와 데상크티스 신부가 쓴 우르바니아 역사에 등장했던 여인 메데아 다 카르피에 마음이 끌렸고, 우르바니아에 온 초기 며칠 동안을 제외하고는 이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메데아 다 카르피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익명의 고서에 의하면 메데아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명랑하고 호감 가는 태도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야망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그녀는 열네 살에 대리 결혼한 잔프란체스코 피코라는 열여덟 살의 미소년 신랑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을 시작으로 스물일곱이 못 되는 짧은 생애 동안 다섯 명의 연인을 파국으로 몰아넣으며 악명을 떨치는데….


세 번째 단편 <사악한 목소리>는 바그너를 추종하여 그 스타일을 완벽하게 모방해 북유럽 설화를 주제로 한 '덴마크인 오지에'라는 오페라를 작곡하려는 작곡가 망누스의 이야기이다.

예술가들의 하숙집에 묵었던 시절, 하루는 하숙집에 살던 모두가 모여 어느 미국인 화가가 망누스에게 사다 준 '차피리노'라는 별명을 갖게 된 18세기 가수 발타사르 체사리의 초상화를 보았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궁금해하자 망누스는 그가 멍청하고 사악한 목소리의 노예이자 경멸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가 망누스에게 차피리노의 애창곡을 신청했지만 망누스는 거절했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에 망누스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며 오페라 '덴마크인 오지에'를 작곡하려 했지만, 다시 대화가 이어지며 이번에는 알비세 백작이 자신이 아는 가수 차피리노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는데….



『사악한 목소리』는 전혀 새로운 존재에 의해 눈에 보이는 공포와 위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익숙하고 잘 아는 세상과 진실이라고 느끼는 것에 어느덧 서서히 낯선 그림자가 드리워져 그것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두려운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이미 친숙하고 잘 아는 것에 어느 순간 전혀 다른 본성이 덧입혀져 그 대상이 이전에 내가 알던 친숙한 것이 아님을 느끼는 순간, 그것은 친숙하지만 낯설고 두려운 전혀 다른 위험과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편하고 아늑했던 대상과 공간이 어느새 불편하고 불쾌한 것으로 바뀌어져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내면이 분열하여 무너져가며 공포를 유발한다.


<유령 연인>, <끈질긴 사랑>, <사악한 목소리> 전부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를 읽어가던 어느 순간 초자연적이고 이상하고 섬뜩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고, 그것을 뿌리칠래도 끈질기게 우리의 인식에 들러붙어 감정을 고조시키며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과연 진실인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과연 실재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만다.

물론 <사악한 목소리>에서는 여성적인 것을 혐오하고 부정하고 지우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매혹되는 남성 작곡가의 애증의 이야기 속에 드러난 페미니즘적 요소도 있기는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시화된 직접적 공포를 볼 수는 없었으나,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드는 인식의 불안과 강박으로 인해 실재와 허구를 구분할 수 없는 붕괴된 의식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읽는 내내 숨 막히는 공포를 조성하고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버넌 리의 『사악한 목소리』를 읽고 그녀가 추구한 이야기 세계의 낯익음 속에서의 낯섦으로 인해 아는 만큼 두려움을 일으키는 공포의 미학에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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