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가락에 눈이 생긴 한 아이가 세상에 전하는 용기의
메시지!
'틀림'과 '다름'의 차이, '온전한 나'를
이해해가는 과정을 그려낸 성장소설!
꼬물꼬물, 손가락 속에서 벌레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불쾌한 느낌이 살갗을 간질인다. 손가락 속의 벌레가 자꾸 늘어나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것만 같은 그 견딜 수 없는 간지러움이 하필이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아이를 괴롭힌다. 고교 야구 결승전
경기 9회 말 투아웃 만루 상황. 결정적인 송구 한 방이 승패의 향방을 결정짓는 절대 절명의 상황에 찾아온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처음에는 극도의 피로감과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착란 현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극한의 상황에 치닫게 되면 우리의 뇌와 몸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손끝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착란쯤이야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참아야 했다. 삶에서 인내해야 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는 운동을 하다 보면 몸소
알게 된다. 내 손끝에서 벌레가 기어다는 것 같아요, 따위의 말로 경기를 멈출 수도 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이는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손가락에 눈이 생겼을
때는 어떤 병원에 가야 할까?"
<손가락이 간질간질>의 주인공 유아이는 고교 야구 결승전의 마지막 마운드를 책임져야만 하는 팀 내 에이스
투수다. 팀에서 가장 믿을 만한 투수이자, 결승전 마운드에 마지막으로 나서 승리를 만끽할 자격이 충분한 선수이자, 강력한 최우수 선수 후보다.
이 대회에서 가장 많이 던진 투수였고 승리를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기에 모든 피로와 중압감을 견뎌야만 했던 아이는 마지막 순간에 찾아온
'간질간질'한 느낌 하나로 인해 모든 것을 망칠 위기에 놓이고 만다. 그렇게 쫓기듯 힘겹게 아이의 가운데손가락 끝을 떠난 공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각도를 그리며 극적으로 홈플레이트 코앞에서 하강하여 아이의 학교가 우승을 차지한다. 최우수 선수상과 최우수 감독상에 '위기의 순간에 초강심장만이
던질 수 있는 과감한 폭포수 커브'라는 표현으로 아이를 치켜세우는 신문기사까지 쏟아진다.
정말이지 우승만 하면 세상이 싹 바뀔 줄 알았어요.
정말이지 최우수 선수만 되면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 28p
목표하던 것을 이루고 나면 세상이 달라질 것만 같았던 희열도 잠시, 유니폼을 입지 않으면 자신을 알아보는 이 없는
교무실과 야구공이 날아다니지 않는 연습 없는 경기장의 어색함만이 다시 일상을 채울 뿐이다. 이럴 땐 늘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지닌 백이를
보고 싶지만 어쩐지 자신을 피하기만 하는 듯하고, 아버지와 다름없는 '브라더'와 그의 아내인 '시스터'의 사이도 예전 같지 않다. 아이는 여전히
간질거리는 손가락과 그 안에 생긴 콩알을 만지작거리며 모든 것을 잊고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고, 이 깊은 피로감을 내려놓고 싶다고 생각한다.
머지않아 고통에 무뎌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물론 더한 고통이 찾아온다는
것도 알았죠. 고통이 갱신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도 알았어요. 그러다 보면 선수 생명이 짧아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어요.
…(중략)…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슬프지도, 걱정이 되지도 않았어요. 어깨도, 사람도, 사랑도 하늘에서 정해준 수명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어버렸어요. 그게 고통을 넘기는 가장 편한 방법이니까요. 그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사는 방법이니까요. / 51p


그러던 다음날의 아침, 아이는 갑자기 강한 어지럼증과 함께 얻으면 안 될 무언가를 얻은 것 같은 위화감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낀다. 분명 두 눈을 꼭 감았는데, 무언가가 보인다. 가운뎃손가락 끝에 눈이 생긴 것이다. 콩알만 한 눈이 생긴 것이다. 아이는
이 사실을 누구한테 말해야 할지, 어느 병원으로 가야할지조차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진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던 아이는 우연히
뒷산에 올라가다 늘 훈련 때문에 보지 못했던 봄 풍경을 세 번째 눈이 생겨서야 비로소 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두 눈을 감고 손가락에 달린
눈으로 하늘을 보는 일이 꽤나 멋진 일이라는 것 또한 깨닫는다. 마치 본체는 하나지만 모니터가 두 개인 컴퓨터를 이용하듯 세상을 더 넓고 많이,
깊게 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차츰 아이는 세 번째 손가락을 세상 밖으로 공개해나가기 시작한다. 병원에서조차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기이한 일에
각종 매스컴과 세간의 관심이 아이에게로 집중된다. 마치 연예인이라도 된 듯 연일 화제의 중심에 올라 일약 스타가 된다. 이렇듯 <손가락이
간질간질>은 어느 날 갑자기 손가락에 눈이 생겨버린 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써 환상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삶을 산다거나 혹은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방식의 이야기를 그려나가지 않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설은 아이에게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질 것을 기대하게 하기보다 남들과 조금 다른 신체적 특징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WILL도, 묵묵히 아이를 지지해주었던 브라더와 시스터도, 아이가 돌아올 자리를 변함없이 지켜준 감독님도, 세 번째 손가락 때문이 아니라 아이의
인성과 진솔함을 더욱 특별하게 여겨준 방송국 사람들도 모두 하나같이 아이의 용기를 응원해준다. 오히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통해 '온전한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기도 한다.
책을 읽다보면 이 소설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란 작품을 오마주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갑자기 전염병처럼 눈이 멀게 되는 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을 잃었을
때에야 느끼게 되는 중요한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반대로 <손가락이 간질간질>에서는 세 번째 눈을 얻은 자의 모습을
그려나가지만 이 역시 '가짐'과 '잃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깨닫게 함은 물론 남들과 다른 특이점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BE의 말을 듣고 난 뒤 콜맨은 미소를 띤 채 설명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 긍정적인 방향으로, 연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랑 앞에서, 때로는 변기보다 더
심한 것으로도 변하지 않느냐며 되물었다. 그 과정은 힘겹고, 그 힘겨움이 삶에서 휴식의 순간을 앗아간다고도 덧붙였다. / 89p
<손가락이 간질간질>은 크게 성장소설의 유형을 따라가고 있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좋을 작품인 듯하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나름의 반전과 그로 하여금 성 정체성과 사랑, 이해에 대한 폭넓은 주제까지 생각해볼 수 있으니, 이
소설이 양산해내는 풍성한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의외의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또한 감출 수 없다.
그나저나 팔꿈치가 유독 간지러운 오늘, '헉, 내 몸에도?'하는 생각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