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잡한 인간사의 기묘한
운명을 비현실적인 세계관과
결합시킨 새로운 판타지
미스터리!
1700년대, 일본의 에도시대. 에도를 중심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한 이래로 무사계급의 최고지위에 있는 쇼군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시대다. 철저한 주종관계와 더불어 무사계급의 80%가 농민과 공상을 지배하였으니 칼과 무력 앞에서 자행되는 수많은 난립들이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도 허다하였을 것이다. 마치 우리의 홍길동이나 임꺽정과 같은 민중의 영웅들이 에도시대에도 두어 명쯤 있었을 것이라 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고, 신으로부터 얻은 묘한 능력을 지닌 자가 어디 깊은 산속에 산다더라 같은 소문들이 나돌아 다니는 것 또한 크게 이상할 것이
없는 세상이지 않았을까. 이를 테면 잠들기 전의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할머니의 상상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기묘한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금색기계>는 바로 이러한 기묘한 환상문학의 원형을 지닌 판타지소설이다. 제67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라는 이력이 조금은 의아할 만큼 기존의 일본 추리소설의 계보와는 사뭇 다른 전개와 구성을 지녔기에 새로운 판타지
미스터리 형식의 작품이라 소개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제목 또한 참 기이하다. '금색기계'라니. 동력을 써서 움직이는 장치로써 설명되는 그
‘기계’라는 단어의 뜻이 맞는 것인지 한자를 읽으면서도 묘한 어색함을 감출 수 없다. 더군다나 '신이 검을 하사한 자'라는 부제가 지닌 무협
혹은 시대적인 느낌과도 어울리지 않아서 작가가 이 책 속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을지 무척 궁금해진다.
인간이 아닌 자,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
만지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힘을 지닌 소녀 하루카. 그녀는 의사인 아버지 신도를 따라
아파서 더 이상 손 쓸 방도가 없는 환자들에게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뿐, 평소에는 아버지의 지엄한
명령으로 능력을 봉인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영감에게서 "언젠가 금색님을 뵈러 가보아라" 라는 말과 함께 온몸이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는 신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자신의 능력이 아버지를 위해 쓰이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길 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인 신도가 친아버지가
아니라 떼죽음을 당한 유민들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자신을 거두어 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한 가메라는 한 사내로부터 추행당할 뻔한 위기에
처하면서 아버지와의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능력을 써버린 것에 대한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점차 자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가 들기 시작한 그녀는
결국 살던 곳을 떠나 금색님을 찾아가기에 이른다.
뭔지 잘 모르겠다.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중략) 머리 부분, 투구는 장식 없이 둥글고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눈 부분에는
투명한 유리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그 외의 입이나 목 같은 부분은 전부 금으로 빈틈없이 덮여 있었다.
(중략) 너무나도 기이했다.
신.
이것은 진짜 신이다. / 63p
과거 1547년, 마을에서 떨어진 벽지에 하늘 사람들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유젠가가 세를 형성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하늘에게 하사받은 무기, 방어구, 폭약, 지혜를 하늘 사람들이 다시 올 때까지 지켜야 할 의무를 지닌 특수한 가문이었다. 당주인 미카게를
중심으로 호쿠슈라고 불리는 남녀 수십 명이 이곳에서 기거하며 각종 집안일과 베 짜기 등을 하고 유사시에는 군사로 동원되기도 했다. 그 중 달에서
온 인간이 아닌 존재가 하나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금색님' 즉 쓰마베였다. 그녀는 현세의 섭리와는 동떨어진 하늘의 비술로 만들어진 천기였기에
성별을 자유자재로 바꾸고, 뛰어난 무력을 지닌 특수한 능력으로 유젠가 일족을 따르고 지켜야 하는 임무를 지녔다. 그러던 어느 날,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일을 계기로 더 이상 천기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당주인 미카게는 하늘의 무기를 인간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가문의 종막을
선언하지만 그의 딸 지요가 이를 거부하고 스스로 새 당주가 되어 쓰마베를 데리고 떠난다. 이후 오랜 여행 끝에 여러 동료들을 만나 조직을 만들고
산 속 깊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가 귀어전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렇듯 <금색기계>는 금색님이 무려 150년 이상 지요의 후손들을 섬기며 귀어전에 머무르게 된 사연,
손만 닿으면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하루카가 금색님을 만나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를 찾기까지, 그 복잡하고도 장대한
여정을 명쾌하게 그려나간다. 200년이라는 긴 시간의 흐름을 통과하기 위해 작가는 주요 등장인물 각자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얽히고설킨
인간사와 내적 묘사들을 허투루 흘리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로 응집해 견고하게 풀어나가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돌아왔다
다시 더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이 구성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가도 어느 사이에 '아, 이게 이 이야기로 통하는 거였어?' 하고 무릎을 치게
하는 힘이 있달까. 여러 인물의 시점에서 그간 의문으로 남아 있던 미스터리들이 하나씩 풀릴 때마다 이 소설이 판타지 문학상이 아니라
추리작가협회상을 받은 이유를 짐작케 한다.
사실 많은 소설에서 '신'이라는 존재를 끌어들이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시대성과 어울리지 않게 기계로 형상화된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것이 때로는 소설을 읽으면서 위화감을 들게 하고 더러 풋, 하고 웃음도 나오게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상관없다고,
어쩌면 환상의 그 이면에 존재하는 선악, 복수, 이해와 용서와 같은 인간의 복잡한 감정사에 더욱 초점을 맞추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독특하고 엉뚱하지만 그럼에도 재미있는 장르 소설 한 편을 만나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었다. 한동안 생각할 것이 많은 주제의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기분 전환 삼아 이런 장르 소설로 책 읽는 즐거움에 빠져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