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짝사랑의 열병처럼 뜨겁고,
민들레 솜털처럼 순수했던 추억의 그 시절, 그 소녀들!
폭력과 억압으로 얼룩진 1979년의 시대를 통과해온
소녀들의 발칙한 성장기!
무릎과 허벅지 사이, 1cm 차이에도 예민하게 굴었던 교복 치마 길이만큼 사소하지만 나를 둘러싼 세상의 그 모든
것들에 한없이 민감했던 시기가 있다면 바로 사춘기 혹은 여고 시절이 아닐까. 나에게 있어 그 시절은 총총거리던 단발머리를 귀 밑 몇 센티까지
자로 잰 듯 검열을 하곤 했던 시대로부터 막 해방을 맞이하던 때였고, 낯모르는 이와 주고받던 펜팔 편지를 누구 볼세라 우편함을 하루에도 몇 번씩
기웃거릴 때였으며, 손수 엽서에 사연을 적어 보내거나 듣고 싶은 음악이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기를 고대하며 빈 카세트테이프에 심혈을 기울여 녹음
해대던 시대였다. 하고 싶은 게 많았으나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았던 때였고, 철은 들었으나 세상의 이치에는 아직 어리숙하고 늘 어리둥절할
때였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안절부절 하지 못했던 때였으나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좋았다고 말하게 되는, 짧지만 생애 가장 반짝이는
청춘으로 아름다웠던 바로 그 시절.
허벅지를 뚫고 올라오는 호르몬의 왕성한 활동과 호기심을 <선데이 서울>과 <야담과 실화> 같은
잡지로 은밀하게 해소하는 와중에도,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고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연습장에 '황칠'을
해가며 외웠다던 고백이 어쩐지 낯설지 않을 이들에게 반가울 만한 소설 한 권이 출간되었다. 바로 <란제리 소녀시대>다. 현재
KBS에서 방영되고 있는 동명 드라마 '란제리 소녀시대'의 원작소설로, 1979년 10월 박정희 정권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두환 군사정권이
집권을 시작할 무렵의 대구를 배경으로 18세 여고생 소녀들의 일상과 그들이 여자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작가 소개를 읽고서야
알았지만 2009년에 이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 문학 도서에 선정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하면서 재편집되어 출간된
것으로 보인다.
<란제리 소녀시대>는 소녀소녀한 감성이 돋보이는 표지이미지와 달리 소녀를 수식하는 '란제리'라는 단어가
어쩐지 낯설고 기이하게 느껴져서 유독 시선을 끈다. 특히나 1979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란제리'라는 여성 속옷을 뜻하는 외래어가
'소녀'와 어울릴 만한 단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금기와 억압된 욕망, 혹은 민감한 감성으로 충만한 시절을 상징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과감하게 이를 문학적으로 차용한 저자의 의도가 무척 궁금해지는 것은 곧 이 책을 향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은 이제 한
딸아이의 엄마가 된 주인공 정희가 딸과 공유하며 사용하던 생리대와 칠칠맞게 얼룩처럼 묻어나온 생리혈의 흔적을 보며 의도하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곤 했던 청춘의 상흔을 떠올리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단순히 추억 소환이나 하이틴 로맨스로 점철된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 아니라
변혁을 맞았으나 다시 또 공포의 시대이기도 했던 그 시절 수많은 소녀들의 상처와 성장통이 피부처럼 들러붙는 경험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나와 나의 언니들, 혹은
엄마의 이야기이도 한 소녀시대
그리고 다시 쪽문을 나오면 장미 넝쿨이 있는 우리 집이었다. 정원에는 붓꽃과 라일락이
한창 꽃을 피워 올리느라 숨가빠했고 장독 안에는 구더기가 맹렬하게 꿈틀거리며 생의 한때를 건너고 있었다. 소녀들은 첫 생리혈이 묻은 속옷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고, 소년들은 이불 속에서 몰래 정액을 뿜어내며 남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책상 위에 써놓은
명구를 보면서 소년들은 야망이 뭔지 모르지만 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소녀들은 우릴 무얼 품어야 하나 혼란스러워했다. / 42p
문득 열여덟의 나이란, 많은 상상과 착각 속에서 설렘과 상실을 반복하게 되는 때라는 생각이 든다. '하면 된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문구로 선동될 수 있는 나이여서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만큼 가질 수도 뭔가를 해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자주 품게 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무슨 야망을 품으면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막연한 때이기도 했다. 그저
고3이라는 인생 최대의 시험 앞에서 가족들의 집요한 위로와 응원을 받아가며 기계처럼 문제집을 풀어대고 책상에 눌러 붙어 앉아 있으면 좋은 대학을
가 잘 살 수 있겠지, 했던 때가 아니었을까. 소설 속 정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모호한 기대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막막함이 활시위의
긴장처럼 온몸의 신경을 팽팽하게 당기는 나이를 통과해오고 있었다. 짝사랑 하던 상대를 본의 아니게 친구와 공유하고, 그것을 잃게 되는 순간
감기처럼 찾아오는 열병들에 몸살을 앓기도 하고, 그러다가 우반과 열반으로 나뉘는 입시 생존 경쟁에 자연스럽게 등 떠밀려 현실로부터 살짝 비켜난
어느 낯선 곳에서 비현실적인 체험 같은 것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레슬링이 쇼고 김일도 먹고살기 위해 쇼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나는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누구나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이유 하나쯤은 주머니칼처럼 가지고 다닌다. 호랑이 가운을 휘익 바람에 넘기며 김일이 사각의 링 펜스를
넘어올 때,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호랑이 가운을 코치에게 휙 던질 때, 철창 매치를 하다 극본에 짜여진 대로 머리에 피를 내고 괴로워할 때,
인생은 먹고살기 위한 어떤 쇼라는 생각을 했다. / 67p

이렇듯 소설은 정희와 혜주라는 인물을 통해 과거의 관습과 변혁의 시대 사이에서 여전히 고립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소녀들의 고민과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던 성장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고백한다. 특히, 혜주는 서울에서 전학을 와
시와 철학을 가까이 했던 소녀로 여성을 옥죄는 사회적 제도 및 관습과 규율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목소리를 냈던 강단 있는 소녀였다. 정희의
관점에서 혜주는 하얗고 고운 얼굴로 지성미를 뽐내며 질투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서울 소녀'이기도 했지만 문학과 철학으로 이 시대의 불행을
위로받고 또 그것을 고민할 줄 아는 또 다른 자아상이기도 했다.
"오히려 삶은 긴장하지 않으면 어느 틈에나 공격할 복병처럼 우리에게 쳐들어와.
희망이라는 것도 삶을 위한 마약 같은 거라고 봐."
"그래, 삶이 어떤 공격을 해올지 모르니까 우리는 삶에 대해 조심해야 할 거야.
그러나 상상의 영역들, 희망의 영역들이 꼭 허구의 영역인 것만은 아니야. 그것은 인생의 과정 혹은 그 자체의 깊은 이해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우리 삶에서 불행을 돌보듯 희망도 돌봐줘야 하는 거야." / 131p
이 소설의 거대한 반전과도 같은 혜주의 상처는 그래서 더욱 뼈아프다. 불만족스러운 세계에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줄
알았던 이 고매한 소녀를 무릎 꿇게 만든 낡은 관습과 폭력, 억압의 존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하나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나서서
말하지 못하는 낯부끄러운 회피들. 유독 소녀들에게 훨씬 변덕스럽고 부당한 현실을 고백하며 여성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만든 '란제리'가
오히려 자신의 몸을 조여 오는 비정한 현실을 꼬집는 작가의 냉철한 시선이 날카롭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인간이란 세계와 불화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이라고, 누구나 자신의 세계와 싸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독려하던 김화순 선생님의 말은 매우 의미 있게 다가온다.
오래전부터 이런 일들은 되풀이되어왔다는 생각도 든다. 이미 세상이 만들어놓은 지도
위에서 여자들이 단단하게 몸을 감싸고 다시 그 몸을 찢는 일 말이다.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투명하고 얇은 막 같은 거 말이다. 란제리처럼 몸을
보호하던 것이 오히려 몸을 조여오는 거 말이다.
소녀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과 여자가 된다는 것은 다르다. 소녀는 훈육과 통제 안에서
'여자'가 된다. 훈육과 통제에서 벗어나려하면 누구라도 한번 들어가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두운 연못 속에 빠지고 만다. 삶의 폭력이
부당하다고 소리쳐 말할 수도 없다. 폭력은 또 다른 2차 폭력을 가져올 뿐이니까. 소녀들에게 삶은 훨씬 변덕스럽고 심술궂다.
그래서 소녀는 자란다. 세상이 우리의 갈망에 순순히 응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 277p
"모두들 조금씩 자기 모습에 불만족하면서 세계와 싸워나가는 것이다. 인간이란 그렇게
세계와 불화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이지. 누구나 자신의 세계와 싸우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지옥과 마주 싸울 각오도 의욕도 없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노?" / 275p
앞서 쓴 글로 인해 소설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마치 한때 유행했던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러했듯 지난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요소와 남녀 고교생들이 나누는 미묘한 감정들, 대구 사투리 특유의 퉁명스럽지만 은근 간드러지는 말투
등 가독성을 높이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극의 재미를 더한다. 비틀즈, 조다쉬 청바지, 지글지글 끓는 방 안에서 삼삼오오 모여 즐겼던 추억의
전기게임 등 당시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추억의 아이템은 물론, 운 좋게도 나와 같은 대구 토박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동성로, 반월당, 만경관,
자갈마당 등 지역적 색깔을 덧입힌 사실적인 배경 묘사들은 극적 완성도를 높인다. 개인적으로 정화여고를 졸업한 까닭에 이 소설의 주인공인 정희와
혜주가 다닌 학교가 정화여고인 점은 더욱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으니 이제는 드라마를 찾아서 감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작은
원작대로,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매력과 재미가 있기 마련이지만 원작소설이 있다는 것은 은근 어느 쪽이 더 괜찮다고 저울질하는 재미도 있으니
말이다. 희망보다 상실이 더 많은 시대를 통과해야했지만 그 속에서도 속살거리고 깔깔거림을 멈추지 않았던 나와 나의 언니들, 엄마들의 삶을
응원하게 되었던 소설이라 더욱 애착이 가는 작품, <란제리 소녀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