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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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증오, 차별과 불안이 증폭된 시대를 진단하다!

우리 사회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미래의 방향성을 모색해 보기 위해 지금 당장 읽어야 할 책!  

 

 

 

 

 

   '극혐', '여혐(여성혐오)', 성소수자 혐오 및 영호남을 가르는 지역 혐오까지 언제부턴가 '혐오'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야말로 '혐오사회'다. 성소수자와 다양한 인종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양성평등의 조건을 구조적으로 갖추려는 시도들이 계속되면서 과거에 비하면 참 살만한 세상이라고들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분법적 사고와 증오를 야기하는 갈등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져만 갈 뿐이다. 물론 저마다 추구하는 성향이란 게 있고 싫으면 싫다고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집단의 감정으로 응고되어 변질되고 증폭하여 폭력과 광기를 양산하기까지 하는 것은 더 이상 간과할 수없는 사회 문제다. 우리는 왜 지속해서 증오와 혐오를 반복하는가?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는 것들은 대체 무엇인가.

 

 

 

   전 세계의 분쟁지역을 다니며 독일의 저널리스트로 활약한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를 통해 이주민, 흑인, 성소수자, 여성들을 향한 증오와 혐오의 메커니즘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들이 무엇인지 논의하고자 한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대고발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증오와 혐오의 문제에 우리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고 책임을 나누어야 하는지 엄중하고도 신중한 메시지를 던진다.

 

 

 

배제의 메커니즘과 인간을 박해하는 섬뜩한 공격성

 

 

   카롤린 엠케는 혐오와 증오는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따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라고 말한다. 사회문제의 기원이나 원인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 결과인 것이다. 종교가 다르거나 아예 없는 사람들, 겉모습이나 사랑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계속 심화되고 확대되면 결국 모든 사람이 해를 입게 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증오와 혐오를 그 이데올로기적 전제들로부터 분리해 어떤 역사적, 지역적, 문화적 맥락에서 발생해 작동하고 있는지 고찰해야 한다. 증오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근원과 증오가 날뛸 수 있게 하는 구조, 증오가 작동하는 기제를 파악해야만 그것에 대응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 1장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는 일반적인 기준과 뭔가 달라 보인다는 이유로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로 치부하는 인간 내부의 섬뜩한 공격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배제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분석한다.

 

 

 

   책 속에서 설명하는 클라우스니츠 동영상의 장면은 증오와 혐오가 야기하는 모순된 구조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동영상에는 버스에 타고 있는 난민들에게 집단으로 고함, 시위, 비방하는 사람들의 행태가 담겨져 있다. 난민들을 태운 버스가 마치 한 마리의 짐승처럼 쫓기다가 결국 붙잡히는 일종의 '사냥'처럼 구성되어 있다. 그날 버스에 타고 있던 난민들은 개개인으로서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보편적인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각자 특유한 개인사와 경험, 특징을 지닌 인간 존재임을 부정당했다. 아무 힘도 없어 보이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간신히 지켜낸 비닐봉지나 배낭에 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이었지만 엄청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되어 증오해 마땅한 사람들로 인식된 것이다.

 

 

 

   반면 버스를 둘러싸고 있는 부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구호를 외치고 고함치는 이들이고, 또 하나는 멀찍이서 구경꾼처럼 바라만 보고 있는 이들이며 나머지 하나는 경찰관들이다. 저자는 동영상을 반복해서 볼수록 버스 바로 앞에서 고함을 지르는 무리보다 그 구경꾼들에 더 의아해진다. 왜 이들은 아무도 상황에 개입하지 않는가? 멀찍이서 바라만 보는 이들은 증오를 발산하는 무리의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마치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경찰관들 역시 마찬가지다. 무기력과 속수무책의 중간쯤에서 이도 저도 아닌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시위자들에게 계속해도 된다는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듯 복합적인 배제의 메커니즘, 즉 난민들을 증오해 마땅하다고 인지하게 하는 시각과 지각 패턴은 대체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분노에는 언제나 그것이 발생하고 표명되는 특정한 맥락이 있다. 증오의 근거로 언급되는 이유들, 어떤 집단이 증오해야 '마땅하다'며 갖다 대는 이유들은 누군가가 구체적인 역사적 문화적 틀 안에서 산출해낸 것일 수밖에 없다. (중략) 강렬하고 열렬한 증오는 오랫동안 냉철하게 벼려온, 심지어 세대를 넘어 전해온 관습과 신념의 결과물이다. "집단적인 증오와 멸시 성향이 생겨나려면 (중략) 사회적으로 증오와 멸시를 당하는 이들이 오히려 사회에 피해나 위험이나 위협을 가한다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한다." / 76p

 

 

 

   저자는 클라우스니츠에서 증오를 일으킨 이데올로기는 클라우스니츠 안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밝힌다. 작센 주 안에서만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난민들을 원칙적으로 자신과 동등하며 고유한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모든 인터넷 포럼과 토론 포럼, 출판물, 토크쇼 등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오로지 전체를 대표하는 표상으로 모든 남녀 무슬림 또는 이주자를 테러리스트 또는 미개한 '야만인'으로만 혐오스럽게 묘사하는 매체들의 심각한 문제는 이들에 대한 다른 면모를 상상하는 일 자체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증오의 공급자들과 증오와 공포를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는 공포의 부당이득자들, 스스로 행동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동조적으로 용인하는 사람들 역시 증오를 가능하게 하고 확장한다. 폭력과 위협이라는 수단은 지지하지 않더라도 은밀하게 이를 묵인하고 방조하지 않았더라면 증오는 결코 그렇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 묵인하고 방조했던 우리 모두는 ‘증오에의 공모’에 가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종교가 다르거나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거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은 마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림자도 생기지 않는 존재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되고 무시되는 곳들이. 상규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은 바닥에 밀쳐 쓰러뜨리는 곳, 아무도 그가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주지 않는 곳,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곳, 뭔가 다르다고 괴물 같은 존재로 취급하는 모든 곳, 바로 거기서 증오에의 공모가 일어난다. / 94p

 

 

 

   저자는 증오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보다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동질성, 본연성, 순수성에 있다고 진단한다. 동질성은 절대적인 ‘같음’ 만이 동질성으로 간주되고, 다른 모든 것은 배제하고 거부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드시 건강을 유지해야만 하는 국가의 몸이라는 생물정치학적 환상은 아주 작은 차이 앞에서도 공포를 촉발한다. 마치 단일 국가라는 이미지에 맞추어 공동체를 동화시키고, 자신들의 동질적 국가 또는 민족이라는 관념에 어긋나는 모든 의견과 관점을 불편하게 치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가 국정교과서에 유달리 관심을 갖는다는 저자의 견해는 어쩐지 우리를 떠올리게 해서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본연성이란 신념이나 정체성은 어떤 본원적인 이데올로기나 본연의 질서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더 훌륭하고 중요하며 더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국가적 사회적 규제와 규율에 따라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으로 지정한 성별 역할을 본연성이라 규정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저자는 이로 인해 지정된 성별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며 배제시킨 많은 트랜스인들을 향한 왜곡된 증오와 멸시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이어서 순수성은 ‘초국가적인 우리’를 내세우며 순수함을 숭배함으로써 자신들이 가장 높은 지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IS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IS가 폭력으로써 세우고자 하는 것은 모든 해로운 열정들을 위생적으로 제거한, 엄격하게 경건한 질서다. 이 순수의 페티시즘은 모든 혼종, 모든 다원성에 극렬히 반대한다. 다양한 종교적 신념과 실천방식이 서로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집단적 폭력과 광기를 유발시킨다.

 

 

 

순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찬미

 

 

   우리가 증오와 혐오에 맞서기 위해서는 순수하지 않은 것과 다른 것을 옹호하는 자세, 즉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사회 구성원에게 안정감과 신뢰를 가져다준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다양한 삶의 방식과 다양한 종교적, 정치적 신념을 허용하고 용인한다는 것을 느끼면, 나 자신이 상처 입기 쉬운 존재라는 느낌이 줄어들며 개인적으로 나와는 거리감이 있는 삶이나 표현 형태에도 마음의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진실 말하기’를 통해 현실을 협소하게 파악하는 인식의 틀과 개인들을 단지 한 집단을 대표하는 표본으로만 보는 잘못된 일반화를 해부하고 해체할 수 있는 논의들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종교와 정치와 성의 다양한 양상들이 자유롭게 번영할 수 있는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사회를 수호할 의무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종교나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멸시받고 위협당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차별을 감지해내는 일, 사회적 공간이나 담론의 공간에서 추방된 이들에게 그 공간들을 열어주는 것과 같은 작은 일들이다. 어떠면 증오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고립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자기 밖으로 나와 다른 이들을 향해 가는 움직임,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사회적 공간, 공공의 공간을 다시 열기 위한 움직임 말이다. / 27p

 

 

모두가 지켜야 할 것도 바로 그 존엄이다. 스태든 아일랜드에서든 클라우스니츠에서든 이 증오, 이 폭력은 "오늘부로 끝장나야 한다." 감정을 정치적 논증으로 끌어올리는 포퓰리즘, 명백한 인종주의를 뻔뻔하게 은폐하는 '불안'과 '걱정' 같은 수사적 가리개는 "오늘부로 끝장나야 한다." 모든 감정적 혼란과 내면의 천박함과 그릇된 음모론적 확신을 침범할 수 없고 진실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럼으로써 비판적 자기반성과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리는 공적인 담론은 "오늘부로 끝장나야 한다" / 126p

 

 

 

   이렇듯 <혐오사회>는 증오와 혐오의 메커니즘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판단함으로써 방조와 방치가 아닌,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책임을 나눠야할 문제라는 점을 격려한다. 더 이상 피해자 당사자들의 문제로만 떠넘겨서는 혐오 사회를 극복할 수 없다. 난민 문제가, 성소수자들의 문제가 여성 혐오 문제가 일부 특정 개인 및 집단의 문제로 인식하고 방관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고 고민해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책은 매우 유의미하다. "오늘부로 끝장나야 한다."는 이 강렬한 메시지가 우리 사회에 변화와 자성의 목소리를 드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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