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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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역사와 개인의 삶을 아우르는 수작 중의 수작!

 

 

   얼굴 없는 작가로 알려진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에 이어 마침내 3부작인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가 출간되었다. 한층 두터워진 책의 무게감만큼이나 격동의 이탈리아를 온몸으로 통과해온 파란만장한 두 여인의 삶이 채 읽어보지 않아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사회 전체가 광란의 카니발을 연상케 했던 전편의 이야기에 이어 어느덧 중년기로 돌입한 릴리와 레누의 삶은 보다 더 시대의 흐름 속으로 복잡하게 얽혀 들어갈 것이라 예상되었다. 때문에 통속적인 듯, 그러나 통속적일 수 없는 이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가 3부작에 이르러 더욱 뚜렷하게 전면에 드러나리라는 것 또한 짐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짐작한 대로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우리가 이 거대한 서사를 넘어서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을 저울질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들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격변의 역사와 개인의 삶을 아우르다

 

 

   전편인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에서는 작가로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 레누와 폭력과 상처가 만연한 삶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릴라가 전혀 다른 길을 가는 데에서 마무리 된다. 이어 다음 편인『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분노가 독으로 가득 찬 고름으로 터져 나오는 것’ 같은 도시의 나폴리를 떠나는 삶을 택한 레누와 그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는 삶을 택한 릴라의 상반된 삶을 그려나간다. 즉, 레누는 ‘합리적인 이성의 세계’, ‘위대한 이상과 명문가에 대한 숭배와 원리원칙이 중요시 되는 세계’로 대변되는 약혼자 피에트로의 삶에 귀속됨으로써 빈곤과 병든 고향에서의 삶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반면 릴라는 햄 공장에서 단돈 10리라라도 더 받기 위해 영하 20도의 냉동고에서 일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공장주의 추파와 고단한 현실을 살아낸다.

 

 

 

   덕분에 릴라와 레누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이제 레누는 릴라로부터 벗어나야 할 때가 왔음을 느끼게 되고 보다 주체적이고 이상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녀는 정치적인 열정이 넘치는 지적인 사람간의 모임에서 자신의 소설은 보잘 것 없고, 자신은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공허함에 사로잡힌다. 더군다나 결혼과 출산을 통해 부여된 새로운 역할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료하게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에 숨이 막힌다. 결국, 레누 역시 당시 신여성들이 오랜 학업의 대가로 자신들의 미래가 집안일에만 국한되지 않기를 바랐던 의지를 실행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상실감에 빠지고 만다. 문제는 뜻밖의 방향으로 해소되기에 이른다는 점이었다. 자유부인 놀음이라도 하듯 남편 몰래 다른 남자의 애정을 갈구하거나, 규율을 위반하고픈 충동을 느끼기도 하며 다시금 자신의 앞에 나타난 첫사랑 니노에게 보다 더 열정적으로 몸과 마음이 사로잡힌다.

 

 

 

   한편, 릴라는 조악하기 짝이 없는 햄 공장에서 일하면서 엔초와 매일 저녁에 컴퓨터 공부를 하는 것으로 삶의 위안을 얻으며 살아간다. 그러던 그녀 앞에 파스콸레가 나타나면서 우연히 그를 따라 노동의 현실을 각성시키려는 투쟁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거리는 노조를 세워서 노동 환경 개선에 앞장서려는 청년들과 그들의 행위를 방해하고 폭력을 가하는 파시스트 무리의 충돌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던 때였다. 그녀는 진짜 현실은 모른 채 노동계급이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는 나디아가 위선자처럼 보였고, 그곳에서 이들을 각성시킬 만한 냉담한 노동 환경의 현실을 규탄한다. 이후 그녀는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의 뜻을 모으고 지난한 착취의 현장을 고발하려 하지만, 한계에 봉착하면서 공장을 뒤로한 채 엔초와 새로운 삶의 여정으로 나아간다.

 

 

 

   이렇듯 소설을 읽다보면 이 두 여인과 그들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삶은 그저 한 개인의 역사에만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병든 것은 우리 고향 동네가 아니라, 나폴리가 아니라 지구 전체다”는 표현처럼, 소설 속은 이탈리아 혹은 외부의 세계를 아우르는 격변의 시대 속 상황을 곳곳에서 매우 상세히 묘사한다. 이탈리아 문화의 퇴보와 선거 후 정치판에 대한 분석, 사회민주주의의 패배, 학생 운동과 경찰의 탄압과 같이 이른바 의식 있는 청년들의 화두는 물론, 마리아로사가 주관하는 페미니스트 모임을 통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젖가슴을 드러내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정치에 목소리를 드러내는 실비아의 모습은 꽤나 강렬하다.

 

 

나는 그 젊은 여성의 모습에 동요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소란스러운 강의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보다 어리고 세련되어 보였는데 벌써 한 아이의 양육을 책임지고 있었다. 하지만 육아에 힘쓰는 얌전한 젊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거부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함을 치기도 하고 격렬하게 손동작도 하고 발언권을 요구하기도 하고 분노한 나머지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누군가를 향해 멸시하듯 손가락질도 했다. / 86p

 

 

 

불안한 욕망의 그림자

 

 

   소설의 흐름상 아내로, 아이의 엄마로 성숙해진 두 여인이 중년기에 이른 만큼 개인적으로는 앞선 작품들보다 이번 3부작에서 보다 이입을 한 듯하다. 정치적 혹은 페미니즘적 색채를 떠나 이들 내면에 자리 잡은 불안한 욕망들이 수시로 개인사를 넘나들고, 이들을 선택의 기로로 내모는 광경들이 매우 흥미롭다. 특히나 레누처럼 한때 글쓰기를 업으로 삼았던 나로서는 가정에서의 역할이 사회적 욕망을 짓누르는 데에서 오는 상실감으로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하는 레누의 감정에 이입되고 말았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아이의 엄마로서 살아가는 이 삶을 사랑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림자처럼 붙드는 또 다른 욕망에 특별하기를 바랐던 나 자신이 결국은 평범한 사람이 지나지 않음을 느껴야만 했던 그녀의 좌절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당시 내가 자주 사용했던 표현처럼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내가 그 일을 경험하고 글을 쓸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비록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가 아직도 비이성적일 정도로 고집스레 모든 타협을 거부하는 릴라를 내 기준으로 삼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릴라와는 모든 면에서 달라진 지금에 와서도 릴라가 행동반경을 스스로 고향 동네에 국한시키지 않고 나와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면 릴라가 행동했을 법한 일을 하고 릴라가 했을 법한 말을 했던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 346p

 

 

무엇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어린 시절부터 나를 사로잡았지만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원했다. 그 무엇인가가 뭔지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물론 그동안 무엇인가가 되기는 했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뚜렷한 대상도, 진정한 열정도, 확실한 야망도 없이 말이다. 릴라는 중요한 사람이 되는데 나만 혼자 뒤처질까봐 무엇인가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뭐라도 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바랐지만 릴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 495p

 

 

 

   결국 레누는 그림자처럼 들러붙었던 욕망에 전도되어 니노에게 다시 사로잡히고 만다. 어쩐지 그 결말이 그리 아름답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그간 갈망해왔던 남자에 대한 사랑을 쟁취함으로써 레누는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마지막 4부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기대된다. 앞서 1부작인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릴라를 예고했던 만큼 릴라의 삶에 또 어떤 격변이 일어나게 될지도 궁금하다. 얼른 4부작이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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