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솔지 소설
손솔지 지음 / 새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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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과 읊조림을 오가는 기이하고 낯선 상상력과 섬뜩하리만치 담담한 문장들!

비스듬히 기우는 현실, 폐허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상처들의 이야기!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이 우리 문학 전반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때가 있었다. 천운영과 편혜영을 필두로 하여 현실을 비틀어 낯선 상상력을 덧입힌 그로테스크문학은 당시 문학을 전공으로 삼기 시작했던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날선 직관과 내밀한 욕망, 기이하면서 섬뜩한 문체에 매료되어 나는 물론, 같은 출발선에 선 동문들은 하나같이 그와 닮은 글을 쓰고 싶어 했다. 당시로서는 이른바 기존 문학이 지닌 정통성에서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것만이 새로운 문학세대가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믿었는지 모르겠다. 2010년 이후에 들어서면서 우리 문학은 여전히 그로테스크한 미적 감각을 잃지 않았지만, 보다 세련되게 정돈되어 발전해온 듯하다. 특히 여성혐오와 페미니즘, 개인과 사회 공통의 트라우마에 집중한 형태의 작품들이 상당히 눈에 띈다. 그 중 <먼지 먹은 개>에 이어 <휘>를 발표한 손솔지라는 젊은 작가의 작품이 인상적이다. 앞서 밝힌 주제의식과 더불어, 세련된 그로테스크함의 환상적인 미학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정밀하게 풀어낸 밀도 높은 작품이라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한 글자에서 시작된 8편의 단편들

 

 

   휘, 종, 홈, 개, 못, 톡, 잠, 초. 여덟 편의 소설은 모두 한 글자에서 비롯되어 마침내 확장되었다. 휘- 휘-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듯 유리창에 부딪히는 바람소리에, 작가는 문득 바람이 흘리고 간 이야기를 밤을 새워서라도 들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미처 나에게로 와 닿지 못한 채 유리창에 부딪치고 만 바람의 그 쓸쓸함을 생각하다, 휘- 라는 한 글자가 끌어안고 있던 숨겨진 이야기들을 한 편의 글로 완성한 것이 소설만큼이나 흥미롭다. 표제작인 소설 「휘」는 이름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는 소년의 이야기다. 소설에는 하나 같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름에 ‘악’자가 들어간다던 아버지와 단 한 번도 이름을 불러 본 적 없는 어머니, 지니라는 예명으로 뭇 남성들에게 몸을 파는 소녀, 고약한 악취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름 모를 사내와 가만히 땅콩 껍질을 까주던 반송장의 노인 모두에게 말이다.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모두 불행해졌다던 소년의 독백은 그들을 어디로 데려갔을까. 이름이 없는 이들, 그래서 누구나일 수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속에 스산한 바람 한 점을 불러일으킨다. 표지의 그것처럼.

 

 

그러고 보면 어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어머니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에게도 이름이 있었던가. 어머니는 집 안의 냉장고이거나 선풍기이거나 식칼이거나 양파망처럼 그 자체로 고유명사였다. / 「휘」 28p

 

 

   여덟 편의 단편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은 단연 「종」이다. 계집은 요물이라던 아버지, 모두를 버리고 사라진 어머니, 모두의 종이 된 누이, 그런 누이를 증오하는 ‘나’가 등장한다. 여기서 종은 매우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치이고 치여 나의 몸으로 하여금 깊은 울림을 발산하는 종(鐘)이든 자의적으로는 살 수 없는 종속의 의미인 종이든, 사내들에게 몸과 마음을 휘둘려 ‘나’를 욕보이는 누이는 경멸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균형이 무너진 가족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누이는 아버지의 불순물과 욕설을 거름으로 배양되었다’와 같이 거침없이 담담한 문장으로 담아낸 젊은 작가의 패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어 소설 「톡」 역시, 몇 번의 결혼을 거듭하는 엄마로부터 받은 상처들을 베란다 밖에서 빨대를 이용해 물방울을 추락시키는 행위로 달래곤 했던 소녀로 하여금 이지러진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잠」 또한 현대 사회에 만연한 ‘불면증’이라는 병증을 통해 가족 안의 상처들을 몽환적으로 풀어나간 이색적인 작품이다.

 

 

그건 바로 그녀가 모두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이는 아무 때나 잘 울리는 종이 되었다. 나는 그 울림이 누군가 아프거나 슬프거나 가족이 죽었을 때의 소리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누이를 더 경멸할 수 있었다. 누이와 손가락 하나라도 접촉하는 순간, 나는 오염되고 말리라. / 「종」44p

 

 

   소설 「개」는 제목그대로 개를 화자로 등장시켜 그가 바라보는 인간 세상의 단면들을 담아낸다. 상징과 은유의 기법이 많이 녹아든 다른 작품들에 비해 가장 일반적인 소설에 가까운 작품이나 그래서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반면, 「못」은 상하이와 서울에 각각 떨어져있게 된 연인의 이야기를 통해 소통 불능으로 인해 못 박히듯 박힌 마음의 상처들을 그리고 있다. 여덟 편의 작품 중 그로테스크한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은 바로 「홈」인 듯하다. 고3 수험생 교실 안의 풍경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2명의 자살 학생이 나온 뒤에 저마다 마음속에 깊이 파인 상처들을 홈에 비유함으로써 기이하면서도 낯선 상상력을 견고하게 써낸 수작이다. 마지막 작품인 「초」는 각자의 사정과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 ‘세월호 침몰’ 그 이후의 이야기다. 시류를 읽어내는 날카로운 시선과 함께 광장에 모여 초를 들어야 했던 사람들, 우리 자신에 내재한 복원력을 믿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잘 녹아든 소설이었다.

 

 

가방에 노란 리본을 매달고 다니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언제 누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나를 돌려세울지 모르는 일이었다. 슬픔을 잊는 것이 죄가 아니라 빨리 잊지 못하는 것이 죄가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추모하고 가슴 아파하는 일이 철 지난 연극을 반복하는 것처럼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거리에서 우리는 살고 있었다. / 「초」240p

 

 

사람들은 망설이 없이 나아갔다.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이어지는 초의 행렬은,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가차 없이 잘라내고 살아가려고 해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모두의 마음에 빛을 밝히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순간의 우리가, 끝없이 이어지던 질문의 대답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초」248p

 

 

 

뒤틀린 가족, 불온한 남성상  

 

 

   여덟 편에 이르는 작품을 읽으며 손에 잡히는 가장 큰 주제가 있다면 바로 ‘가족’, 그 속의 ‘불온한 남성상’이었다. 일종의 페미니즘 문학의 성격을 지녔는데, 가족이라는 주제 안에서 여전히 남성중심의 사회에 머물러 발생하는 각종 부정적인 현실과 폭력들에 저항하는 흔적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묘사되는 아버지들은 방문판매 업자나 신문 배달부보다 더 드물게 집을 드나들고, 눈을 현혹하는 살덩어리와 웃음을 빌미로 남자들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려는 것이 여자들이라고 말한다. 중국인 아내를 두고서 한국에 내연녀를 두고 있는 의사, 스카치 캔디를 주며 키스를 요구하는 어머니의 연인 등 어디에도 이상적이거나 건강한 남성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남성으로부터의 평등을 갈구했던 많은 페미니즘 문학들이 2000년대 이후인 오늘날까지도 이처럼 젊은 여성 작가의 작품에서 주요한 화두가 된다는 점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숙제들을 많다는 점을 시사하는 바이기도 하다.

 

 

어쩌면 집 안 곳곳에서 아버지가 숨겨두고 간 심벌즈가 제멋대로 부딪쳐 내는 소리가 아닐까.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이름을 문제 삼았다. 아버지 이름에는 악樂 자가 들어 있었다. 늘 즐겁게 살기를 바라던 조부의 뜻이었다. 아버지는 정말 즐거웠을까. 적어도 어머니만은, 아버지의 그 이름에 깊이 찔려 치명상을 입은 채로 겨우 삶을 연명했다. 날카로운 기역 받침에 가슴 한구석이 꾹 압정처럼 눌려 이따금 참지 못한 비명을 흘리곤 했다. / 「휘」13p

 

 

관객 없는 무대 위에서 연기하듯 아버지는 자상하게 고기를 구워 잘랐다. 희고 보드라운 비계가 켜켜이 낀 살코기는 뜨겁게 달아오른 불판에 쩍 눌어붙으며 흰 정액 같은 불순물을 길게 흘렸다. 누이가 널어놓은 내 요 쪽으로 불판 연기가 몰려간다. 누이는 눈치 없이 또 내 밥숟갈 위에 살그머니 고기 조각을 올린다. 나는 누이의 젓가락이 닿은 살점을 밥공기 밑으로 추락시킨다. 아버지는 한 뺨이 거무스름하게 탄 것이나 붉은기가 빠지지 않은 속살을 구별하지 않고 입에 집어넣어 씹는다. / 「종」54p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결국 약한 것들에 대한 폭력과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 손솔지의 작품을 지배하는 주요 정서인 듯하다. 약자가 폭력에 노출되는 모습을 통해 세상의 모든 연약하고 나약한 것들에 대한 자조 섞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드러나기 까닭이다. 「개」에서는 외국인 며느리가 “나는 사람 아니야”라는 신음을 토해내며, 「톡」에서는 남성에의 종속성과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여러 번의 재혼을 거듭하는 엄마가 등장하며, 「잠」에서는 어머니의 연인이 키스를 요구하여도 입을 다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그녀가 있다. 엄마가 자신을 두고 사라졌지만 가장 아끼던 스카프는 두고 갔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휘」의 소녀에게서는 버려지는 두려움에 대한 자기방어의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모두의 종이었던 누이가 점차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나만의 방’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며 자신의 ‘언어’를 찾아나가는 과정은 많은 영감을 준다.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 최대한 나아가려는 모습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밀 키스의 대가로 스카치 캔디를 받곤 했다. 어머니의 연인은 이가 앙망으로 뒤틀려 있었는데, 종유석 같은 그의 송곳니에 찔려 혓바닥에 상처가 생기면 캔디 포장을 뜯어 얼른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쌉싸래한 혀를 감싸는 다디단 커피 맛은 끔찍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단맛을 입안에서 조용히 녹이며 입을 다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충치보다 무서운 일은 세상에 널렸고, 그녀는 아직 겁이 많았다. / 「잠」202p

 

 

그녀가 이틀 동안 밤새 호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온 날, 어머니는 연인과 함께 모든 짐을 가지고 떠나며 고요를 남기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빈집은 세간 하나 남지 않은 채 처참한 알몸을 드러냈다. 가지고 떠날 가치가 없는 것들만이 초라한 형색으로 남았다. 여태 가구들이 등을 대고 있던 숨은 벽지들은 검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벽지를 타고 올라온 곰팡이들은 정면에서 마주했을 때에 그녀는 깨달았다. 그들이 두고 간 물건 중에 가장 쓸모없고 버리고 싶었던 것은, 다리 한 짝이 고장 난 앉은뱅이 책상이나 전기 코드가 벗겨진 헤어드라이어가 아니었다. 바로 그녀였다. / 「잠」204p

 

 

   약자가 쉽게 폭력에 노출되는 세상,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 관계를 개선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모습을 포착해내 자신만의 소설적 언어를 완성해나가는 손솔지의 작품은 여러모로 음미할 부분이 많아서 즐거운 독서였다. 연일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다 오늘은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 창문을 두드리니, 어쩐지 이 책에서 금방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휘- 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름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는 소년이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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