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
마크 월린 지음, 정지인 옮김 / 심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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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증명을 통해 트라우마의 유전적 증거들을 밝혀내다!

트라우마의 근원과 이해, 극복으로 나아가는 따뜻한 여정!

 

 

  최근 들어 우리 사회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혹은 ‘공황장애’라는 정신적 외상을 겪는 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갑자기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나서 발생하는 불안 장애, 조울증, 우울증, 때로는 자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 이 심리적 반응은 그 크기가 크건 작건 간에 ‘트라우마’가 남긴 상처들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및 세월호 사건,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정농단 사건들이 개인과 국민 전체에 강한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하지만, 가족과 부대끼며 사는 동안에 겪는 트라우마가 개인사에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더욱 강력하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인간이 경험하는 트라우마의 대부분은 가족에게서 온다고 한다. 특히, 저자는 모든 인간관계 중에서 감정적 유대 관계가 가장 높은 가족일수록 그 안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사건과 애착의 결핍 등은 가족 구성원 전체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뿐더러 세대에 걸쳐 유전이 된다고 밝힌다.

 

 

  트라우마의 유전인자가 세대에 걸쳐 이어진다니. 불행의 그림자가 내 아이와 또 다음 세대의 아이에게까지 착 달라붙어 반복해서 나타난다고 생각하니 꽤나 우울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애석하게도 트라우마가 유전된다는 이 충격적인 명제는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는 중이다. 정신의학과 신경과학 교수 레이철 예후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그 자녀들이 겪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신경생물학적으로 연구해왔는데, 자녀들이 부모와 유사한 정도로 코르티솔(트라우마를 경험한 뒤 우리 몸이 정상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는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낮고, 이 때문에 전 세대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재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선구적인 세포생물학자 브루스 립턴 역시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생각과 믿음, 감정이 DNA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가 산모에게 항상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만 하라고 말하듯, 어머니가 만성적이고 반복적으로 느낀 분노나 두려움 같은 감정은 태아에게 각인되어 아이가 환경에 적응할 방식을 준비하거나 ‘사전 프로그램화’한다는 것이다.

 

 

 

“두려움, 분노, 사랑, 희망 등 어머니의 감정은 자녀의 유전자 발현을 생화학적으로 바꿔놓는다.” / 55p

 

 

 

예전에는 부모에게 받은 염색체의 DNA로만 유전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인간 유전체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 지금, 과학자들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피부 색깔 같은 신체적 특징을 전해주는 염색체의 DNA가 놀랍게도 전체 DNA의 2퍼센트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머지 98퍼센트는 ‘비부호화DNA’로 이는 우리가 물려받는 다양한 감정, 행동, 성격 특성을 담당한다. / 58p

 

 

  다시 말해 부모의 트라우마가 그대로 아이의 트라우마가 되고 아이의 행동이나 정서 문제는 부모의 문제를 거울처럼 반영한다. 개인적으로 추운 겨울임에도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싫어하고, 집에서도 창문을 조금이나마 열어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로서는 일종의 ‘갑갑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편이다. 즉, 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고 산소가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정도이다. 그런데 나의 트라우마는 나의 아들에게도 어느 정도 같은 증상을 보일 때가 있다. 닫힌 거실 문을 열어놓거나 목에 뭔가를 두르려고 하면 싫어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로 나의 트라우마가 전이되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내 아이의 몸에 무엇을 물려주었고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가 자라서 사랑을 주는 법도 안다고 했던가, 엄마인 내가 아이에게 얼마나 사랑을 표현하고 주느냐에 따라 아이가 느끼는 애착의 정도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니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기는 어머니를 세상의 전부로 인식한다. 따라서 아기에게 어머니와 분리되는 일은 삶에서 분리되는 일로 느껴진다. 그러면 공허함과 단절을 경험하고 절망과 체념의 감정을 느끼며 자기 자신과 삶 자체가 무언가 끔찍하게 잘못되었다고 믿게 된다. 아주 어릴 때 분리를 경험하면 이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 트라우마를 처리하기엔 너무 어릴 때라 내면에서 벌어지는 감정과 신체감각을 느끼기만 할 뿐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상처와 상실, 실망, 단절에는 그러한 감정과 신체감각이 배어 있다. / 128p

 

 

  중요한 것은 앞서 밝힌 나의 트라우마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를 찾아야만 보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남길 만한 사건에 대해 뚜렷하게 알지 못하고, 명료하게 표현하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이미 철학자 융과 프로이트는 감당하기 어려운 기억은 저절로 흐릿해지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모두 ‘무의식’에 저장된다고 하였다. 과학적으로도 트라우마가 일어나는 동안에는 언어중추가 닫히고 현재 순간의 경험을 담당하는 내측 전전두엽 피질도 차단된다고 한다. 즉, 많은 사람들이 트라우마의 증상을 겪거나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괴로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뚜렷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 역시 갑갑한 것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그것이 나 혼자만의 문제인 것인지, 이전 세대의 가족이 겪었던 트라우마가 전이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나와 비슷한 트라우마를 겪은 가족이 있었는지에 대해 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불편한 가족사 혹은 이전 세대에 트라우마가 존재한다면 침묵 혹은 외면하기보다 꼭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과 가족사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의 실마리, 즉 핵심 언어 지도를 완성해가다보면 거기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핵심 불평, 핵심 묘사어, 핵심 문장, 핵심 트라우마를 나열해볼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게 있다면 가족 관계도를 만들어 보는 방법이다. 

 

 

 

 

 

 

부계와 모계를 비교해보라. 어느 쪽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가? 어느 쪽이 더 부담스러운 느낌이 드는가? 트라우마 사건을 살펴보라. 힘겨운 운명으로 가장 고통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가장 힘든 삶을 살았는가? 다른 가족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가족 중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일을 거의 입에 올리지 않는가? 정보가 완전하지 않아도 걱정 마라.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 신체감각을 안내자로 믿고 따라가라. / 219p

 

 

  이렇듯 가족사가 부모에게 입힌 상처를 아는 것은 곧 나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부모의 차가움, 비판적인 태도, 공격성의 근원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 사건을 알면 자기 고통뿐 아니라 부모의 고통도 이해하는 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나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고, 적어도 나의 탓만은 아니라고 위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끊어졌던 관계를 복구하는 일이다. 저자가 언급한 치료 방법을 활용해봄으로써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성장 경험으로 삼아보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의 유산이기도 하지만 강인함과 회복탄력성의 유산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이들이 극복하는 길에 한 걸음 다가가고, 가족과의 관계 개선에 도움을 얻어 나와 아이에게 건강한 감정적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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