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투쟁 3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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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목소리와 인성, 삶과 얼굴과 눈빛, 그 민낯의 모든 것!

사랑과 육아, 철학과 예술, 일상이 투쟁이 된 크나우스고르적 문학!

 

 

  끊임없이 삶을 반추하고 가감없이 일상을 드러냄으로써 치열한 자기 고백의 글쓰기를 완성한 노르웨이 문학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이 어느새 3권에 이르렀다. 1권이 아버지와 죽음의 존재론적 가치를 탐구하는 것이었다면 2권은 사랑, 결혼과 같은 일상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3권은 2권에서 맺지 못한 이야기의 연장선과 같았다. 벌써 세 권에 달하는 작가의 글을 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이야기는 너무 적나라해서 거침없고 때로 불편할 때도 있지만, 그의 이토록 사적인 이야기에 계속해서 열광하게 되는 것은 오롯이 작가 개인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눈앞의 현실과는 다른 장소, 다른 시간,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나는 그 누구도 아니며 그 어떤 사람도 내가 될 수 있는 곳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책’이라고 하였다. 즉, 국경을 초월하고 세대를 초월하여 너와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나의 투쟁>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아이를 낳고 육아를 경험한 부모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일상의 기록들이 퍽 친숙하게 여겨진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남녀가 하나가 되어 유전이라는 놀라운 자산을 잉태하고 낳는 일은 부부에게 꽤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 부부는 그간의 경험 이상의 많은 생각과 예민한 감정들을 주고받는다. 뱃속에 아이가 들어선 것을 굳이 확인해보지 않았는데도 예민한 직감이 앞섰던 그 미묘한 기분, 조금 무리하거나 배에 충격이 가해졌을 때 혹시나 아기가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운 마음, 누구를 더 닮았을까, 손가락과 발가락 모두 이상 없이 건강하게 나오기를 바라는 간절함 등과 같은 다양한 감정들을 작가 또한 여지없이 마주하곤 했다. 특히, 출산에 임박하여 조마조마한 마음이나 아기가 핏덩이 같은 모습으로 울음소리를 내며 엄마의 가슴팍에 얹어질 때의 그 느낌이란. 마치 세상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다던 작가의 표현은 충분히 공감된다.

 

 

왜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만 최악의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는 걸까. 아니, 꼭 그렇게 생각할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침대 위, 린다 옆에 누워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얹고, 이젠 더 움직일 공간도 없이 자라버린 배 속의 아이를 떠올리니, 실제로 한 생명이 배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나긴 하니까. 그렇다면 그 작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옳은 일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매사에 조심하는 일은 절대 부끄럽고 민망해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도움이 될 일이 아니었던가. 오히려 타인에게 아무 관심도 가지지 않고 되는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더 부끄럽고 민망해할 일인 것이다. / 80p

 

아이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두피에 붙어 있었다. 피부는 잿빛에 가까웠고 왁스를 칠해놓은 것처럼 미끌거렸다. 아이가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그것은 바로 내 딸이 우는 소리였다. 나는 세상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은 정적으로 휩싸였고, 어둠 속에 가라앉아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조산원, 인턴, 린다, 나 그리고 우리의 작은 아기. 빛은 거기에 모여 있었다. / 100p

 

 

  하지만 그 충만한 감동과 환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육아라는 피로감을 몰고 오기도 한다. 육체적인 것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아이와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맞은편에서 줄을 맞잡고 밀고 당기는 정신적 피로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아이를 통제할 수도 그렇다고 마음껏 원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빵긋빵긋 웃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심사가 뒤틀려서 으앙 울어대면 어처구니가 없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공황상태가 되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몸에 새겨진 기억과 감정은 대물림된다고 했던가, 자신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던 작가처럼 때때로 고스란히 유전되는 감정적 유산으로 인해 불쾌해질 때도 있다.

 

 

린다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나는 린다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가 식탁 앞에 앉아 음식을 던지고 흘린다 해도, 이론적으로 본다면 아이가 아무거나 잘 먹고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거나 바닥에 흘릴 때마다 그것을 바로잡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내 속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접시 밖에 작은 빵조각 하나를 흘려도 참지 못하고 야단을 쳤다. 나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는 아버지를 향한 증오심이 숨어 있다. 그런데도 나는 왜 내 속에 있는 아버지를 끄집어내 아이에게 전해주려 하는가. / 148p

 

 

  아이를 키우다보면 나의 욕망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분명 사회적으로 능력 있던 사람이고, 또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에 매달리다보니 미루거나 접었던 나의 욕망들이 불시에 과잉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업을 마쳐야 하는 아내를 대신해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하다 보니 글을 쓰고 싶은 간절함이 감정적으로 솟구쳐 오른다. 인간의 목소리 속에 담겨 있는 슬픔과 불만, 만족감과 기쁨, 우리를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을 건드려보고 싶고, 깨워보고 싶은 열망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 던 김춘수의 <꽃>처럼 그는 언어를 통해 나에게로 와 의미가 되었던 것들을, 예술을 끊임없이 가까이 하고 싶은 작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투쟁>은 나의 삶과 맞닿아 있는 주변의 모든 것들, 내게 있어 의미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담고 싶은 작가의 욕망 그 자체로써 결코 우연히 탄생한 것은 아니다.

 

 

숲의 의미는 내 속에 있던 것이다. 숲에서 의미를 찾는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눈으로 한 번 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숲과 관련된 우리의 행위를 거쳐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무는 베어야 하고, 집은 지어 올려야 하고, 모닥불은 피워야 하고, 짐승은 사냥을 해야 한다. 이런 행위들은 내가 만족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는 내 삶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눈앞에 보이는 숲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 243p

 

 

  앞서 1권과 2권에 비해 확실히 3권은 보다 편하게 읽히고 책 전반을 아우르는 분위기도 안정적으로 느껴진다. 공감대가 형성되는 일상적이고 친근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어서 그럴 것이다. 어쩌면 그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상처들로 가득했던 1권에 비해 사랑으로 가족을 끌어안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정서적 안정을 찾아가는 그의 모습이 여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편,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에 하나는 친구 게이르와의 대화 내용이다. 게이르는 작가가 작품에 대한 견해 및 철학적 성찰, 삶의 존재론적 가치 등에 대해 유감없이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상대이다. 거름망 없이 속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고, 그것을 받아주고 때로는 질타도 해줄 수 있는 친구가 흔치 않은 세상에서 꽤 의미 있는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왜 우리가 그토록 겉으로 보이는 형식과 형태에 집착하는지 알아? 대화하는 방식, 말하는 방식, 강의하는 방식, 서빙하는 방식, 먹는 방식, 마시는 방식, 걷는 방식, 앉는 방식, 심지어는 섹스하는 방식 등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질과 방법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어. 사람들이 정상적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왜 고군분투하는지 아니? 상호관계가 맺어질 때 서로에게서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 바로 정상적인 형태와 정상적인 방식이 존재하는 지점이기 때문이야. / 323p

 

 

  이제 <나의 투쟁> 4권이 나아가는 지점은 어디일까. 세 권의 책을 통해 그가 살아낸 모든 시점에 머물러 본 듯한데, 번역되지 않는 책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는 뜻일 것이다. 어쩌면 다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3권 말미에서 어머니가 떠올리는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1권이 철저히 작가의 시점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면 4권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새삼 흥미롭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이 싫은 전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관점이 차이를 작가가 어떻게 담아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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