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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의 치유 ㅣ 톤 텔레헨의 어른을 위한 철학 동화
톤 텔레헨 지음, 김고둥 그림, 정유정 옮김 / arte(아르테) / 2026년 3월
평점 :

우리 시대의 어른들에게 꼭 필요한 우화다!
우울감에 아파하고 있는 이에게 선물하고픈 단 한 권의 책!
한동안 ‘우울’이라는 감정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감정이 ‘나’라는 존재를 이토록 깊이 잠식할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지만, 그래서 더 답답하고 무력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알 수 없어 고통스러운 이 감정의 곤란함에 대하여.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이토록 무거운 우울이란 감정의 무게에 대하여.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온 우울이란 감정
모든 게 완벽했던 어느 초여름 날의 아침. 귀뚜라미에게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매우 확고한 어떤 감정이 이유도,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혼란스럽고, 나의 모든 것이 삼켜진 것 같은 이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그렇게 고민하던 귀뚜라미에게 개미는 가만히 대답한다. “너는 우울한 거야.” 자신을 괴롭히는 낯선 감정의 정체가 우울감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귀뚜라미는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할까? 도대체 왜?’ 하고 스스로에게 수백 번의 질문을 던지지만 뚜렷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 어쩌면 숲속을 뛰어다니고 날아다니며 즐겁게 노래하던 그간의 모습이 정말 나였을까, 의심스러운 마음까지 들기 시작한다.
귀뚜라미는 한참 동안 누워 있었다. 머릿속 우울감이 으르렁거렸다. “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래,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귀뚜라미는 생각했다.
“그리고 넌 앞으로도 영원히 아무것도 못 할 거야.” 우울감은 으르렁댔다. / 149p
귀뚜라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우울감이 그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바보야! 하찮고 쓸모없는 바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귀뚜라미는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모든 거겠지, 그는 생각했다. / 175p


귀뚜라미의 우울은 쉽게 숲속 동물들에게 전염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쉽게 잊히기도 한다. 우울이란 것이 원래 그런 존재라는 듯, 쉽게 전염이 되기도 하지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해서 우울을 홀로 견디는 이를 더욱 외롭게 만든다. 하지만 다행히도 귀뚜라미 곁에는 바라봐주고 기다려주는 다람쥐가 있고, 괴롭더라도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여기는 나무거미가 있다. 또한 매번 나무에서 떨어져 혹투성이가 되면서도 “오르기 때문에 떨어지는 거야.” 라며 다시 오르는 코끼리가 있다. 그렇게 “우리 모두 너를 위해 뭔가를 하러 왔어, 귀뚜라미야. 뭐라도 할게.” 하고 손을 내밀어주는 친구들이 있어 귀뚜라미는 조금씩 우울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마주하고, 또 자신만의 속도로 치유해나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미안해.” 귀뚜라미가 중얼거렸다. “정말 미안해, 다람쥐야.”
“아직도 우울하니?” 다람쥐가 물었다.
귀뚜라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등과 탁자 파편 사이에서 둘은 다시 차를 마셨다.
“미안해.” 귀뚜라미는 한 모금 들이켤 때마다 말했다.
“괜찮아.” 다람쥐는 매번 대답하면서 그의 빈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 134p
한걸음에 떡갈나무 꼭대기에 도달한 그는 문득 떨어짐과 오름의 의미를 깨달았다. 오름은 내 것이고 떨어짐은 나중에 걱정하면 돼. 그는 그 마지막 말을 크게 외쳤다. “떨어짐은 나중에 걱정할 일이다!”
마침 그 근처를 지나던 다름쥐가 위를 올려답며 말했다. “뭐라고 외쳤니?”
“떨어짐은 나중에 걱정할 일이야!” 코끼리는 다시 외쳤다. 그는 한 발로 서서, 반짝반짝하는 눈을 하고서 평생 느껴본적 없는 행복감을 느끼며 회전을 시도했다. / 141p


어쩌면 나는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에 감히 누군가를 섣불리 위로하려 들지는 않았을까. 우울을 마치 내 안의 적으로 간주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정작 감정의 실체 따위는 알려고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이처럼 『귀뚜라미의 치유』는 우울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며, 숲속 동물들을 통해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여러 감정의 모순과 고민들을 녹여낸 아주 특별한 철학 동화 시리즈다. 네덜란드 국민작가로 알려진 톤 텔레헨의 서정적인 감수성과 김고둥 작가의 따스한 일러스트가 만나 이 작은 책 한 권에 이토록 큰 세상이 담겨 있다는 것에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지금, 어디에선가 우울감에 아파하고 있는 이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이 책을 꼭 선물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