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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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페두사의 문장은 우아하고, 정교하고, 아름답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개인은 어떠한 가치를 추구해야 하고, 또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부활)의 시대.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 아래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에서 민족적 각성과 통일을 염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던 때로, ‘붉은 셔츠를 입은 혁명가주세페 가리발디가 붉은 셔츠단이라 불리는 의용군들을 이끌고 통일의 대업을 완성해가던 시기였다. 바로 이 무렵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표범18605, 가리발디가 의용군들과 함께 막 남부 이탈리아인 시칠리아에 상륙했다는 소식과 함께 시작된다.

 



  주인공인 돈 파브리초는 시칠리아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수장이다. 사냥을 좋아하고 일면에서는 괴팍할 정도로 권위적인 면모를 보이나, 수학과 천문학에 관심이 많고 귀족치고는 시대의 흐름을 냉철하게 파악하며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다. 한편, 돈 파브리초가 누구보다도 아끼는 조카 탄크레디 팔코네리는 변화하는 세상에 금방 적응하는 기회주의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으로, 가리발디가 시칠리아에 상륙했을 때는 의용군에 참가했다가 이후에는 사르데냐 왕국의 군인이 되면서 자신의 정치적 야심에 따라 부와 사랑을 적극적으로 쫓는 인물이다. 돈 파브리초의 딸인 콘첸타가 아닌, 신흥 부르주아로 떠오르는 돈 칼로제로의 딸 안젤리카 세다라와의 결혼은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과, 그에 따른 사회질서가 어떻게 재편성 되어가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모한 짓은 하지 않고 현상유지에 전념하는 것? 그렇다면 얼마 전 팔레르모의 황량한 광장에 울려 퍼진 것과 같은 메마른 총성들이 의미하는 행동이 필요한 것인가? 하지만 그런 총격전들 역시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 !’으로는 결론이 나지 않아! 그렇지 않니, 벤디코?” / 23p

 



늙은 여자의 빈 젖가슴을 닮은, 흐릿한 곡선을 그리는 빛바랜 돔들이 수도원들보다 훨씬 높이 서 있기는 했으나, 무엇보다 수도원들의 음울함과 독특한 성질과 위엄이 도시를 지배하여, 시칠리아의 강렬한 햇빛조차 지울 수 없는 죽음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영주가 마차를 달리던 무렵, 밤이 가까워진 시간, 도시 풍경은 수도원들이 지배했다. 실제로 산 위의 불들은 그런 수도원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수도원에서 사는 사람들과 아주 흡사한 사람들. 똑같이 광적이고 폐쇄적이고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습관처럼 무위도식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산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키우고 있었다. / 30p

 



하지만 연미복을 입고 계단을 올라온 돈 칼로제로로 상징되는 시민 혁명, 자신의 딸 콘체타의 단정한 우아함을 가려 버린 안젤리카의 미모, 예상한 혁명이 초래한 변화를 재빨리 받아들이면서 관능적인 열정으로 현실적인 동기를 치장한 탄크레디. 염려스럽고 성격도 모호한 국민투표. 이 모든 것이 오랜 세월 동안 앞발 하나만 들어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던 그가, 표범인 그가 받아들여야 할 수천 가지 기묘한 일들에 속했다. / 122p

 









  ‘우리는 표범, 사자였다. 우리를 대신할 사람들은 자칼, 하이에나가 될 것이다.’ 이미 자신이 속한 귀족 계급에 불기 시작한 변화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던 돈 파브리초는 돈이 새로운 계급을 결정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권력과 영광 또한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수용할 수 밖에 없음을 직시한다. “저는 구시대와 신시대라는 두 마리 말 위에 걸터앉아 어느 쪽도 편치 않은 불행한 세대에 속합니다. () 우리 세대는 구석으로 물러나서 젊은이들이 이 화려하게 장식된 관대 주변에서 재주넘고 공중제비하는 모습이나 구경해야 합니다.” 이 같은 문장은 무너지는 봉건제 그 마지막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구체제의 몰락과 변화의 길에서 마주하게 되는 번민과 우울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저는 부르봉 체제와 불가피하게 타협했고, 체면 때문에 애정없이 거기에 묶여 있는 구계급의 대표자입니다. 저는 구시대와 신시대라는 두 마리 말 위에 걸터앉아 어느 쪽도 편치 않은 불행한 세대에 속합니다. () 우리 세대는 구석으로 물러나서 젊은이들이 이 화려하게 장식된 관대 주변에서 재주넘고 공중제비하는 모습이나 구경해야 합니다. 이제는 보다는 어떻게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구체적인 관심사를 모호한 정치적 이상으로 포장하는 일, 제 말은, 양자를 조화시키는 일에 능숙한, 민첩한 젊은이들이 필요합니다.” / 230p

 



친애하는 슈발레 씨. 저는 당신에게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완벽하다고 믿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절대로 더 좋아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의 허영심은 그들의 비참보다 더 강합니다. 낯선 사람들의 침입은, 그들이 외지인이든 독립적인 정신의 시칠리아인이든, 완벽에 도달했다는 그들의 몽상을 흔드는 사태이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만족감을 방해하는 위험입니다. 열 몇 개의 민족에게 짓밟혔어도 그들은 호화로운 장례식을 누릴 자격이 있는 제국의 과거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 233p

 









  “이들이 사라지면 다른 색 옷을 입은 다른 이들이 올 테고, 다시 붉은색 옷을 입은 자들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끝날까요? 우리 이탈리아의 상징인 큰 별이 있다고들 하죠.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고정된 별조차 사실 고정된 게 아니란 점을 영주님은 저보다 더 잘 알잖습니까.” 소설은 19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번영과 쇠락’, ‘구체제와 신체제’, ‘전통과 변화앞에서 겪게 되는 갈등과 불안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개인은 어떠한 가치를 추구해야 하고, 또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를 고민하게 하는 표범은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무엇보다 람페두사만의 우아하고, 정교하고, 섬세한 문장이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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