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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
찰스 킹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평점 :

문명의 ‘경계선’이 아닌 ‘연결 고리’로 읽는 흑해의 역사!
이제껏 알지 못했던 흑해에 관한 아주 지적이고 흥미로운 탐구!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성경의 창세기에 담긴 대홍수 신화의 원형이 된 무대.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다가 헤라클레스에게 구출되었던 카프카즈 산맥과 아킬레우스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다뉴브강 어귀의 바위섬이 있는 바로 그곳, 흑해. 역사적으로는 비잔티움부터 오스만제국,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전략적 목표의 중심이었고, 오늘날에는 유럽과 러시아, 중동이 교차하는 21세기 지정학의 핵심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흑해는 여전히 미지의 바다 혹은 역사의 변두리쯤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육지 중심의 시선과 유럽이나 지중해에 치우친 역사 연구는 오랫동안 이곳에 대한 관심을 외면했다. 게다가 냉전을 거치면서 ‘동유럽’이라는 정치적·지리적 개념과 동일시되면서 굳어진 편견도 한몫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찰스 킹의 『흑해』는 매우 진귀한 역사서임에 틀림없다. 2700년의 흑해 역사를 아우르는 이 책은 여러 집단과 언어, 종교가 끊임없이 뒤섞이고 지리적·정치적 경계가 요동치며, 정체성이 중첩되는 거대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흑해 연안에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식민지 도시 국가들이 형성된 뒤, 천 년의 제국 비잔티움과 흑해 연안을 최초로 통합한 오스만 제국을 거쳐, 흑해의 강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려는 유럽 강대국과의 충돌에 이르기까지, 흑해를 중심으로 한 주변국들의 역사와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그리스 도시들과 교역 거점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바다의 모든 구석을 하나의 상업망으로 연결했다. 이 상업망은 내륙에서 일어난 세력들과 페르시아 및 로마의 진출로 흔들렸다. 비잔티움제국과 북방의 유목민들, 그리고 발칸반도와 카프카즈 지역의 기독교 왕들과 대공들 간의 관계는 처음에는 이를 강화했다가 나중에는 약화했다. 흑해 세계는 중세에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들의 진취적 정신에 의해 되살아났고, 한때는 단일 제국, 심지어 오스만 술탄이라는 한 사람의 지배 아래 놓이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의 부상으로 흑해는 남북 연안을 지배하는 세력들 간의 수 세기에 걸친 투쟁의 무대가 됐다. 이어서 19세기와 20세기의 민족 운동이 제국보다는 소규모 국가를 선호하면서, 바다와 그 연안의 일부분을 새로 형성된 국민국가들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역할을 했다. / 34p
노예 무역은 오스만 치하에서 더욱 활발해졌고, 오스만은 이를 규제하기 위한 과세 체계를 마련했다. 노예는 흑해 연안에서 단일 수입원으로는 단연 가장 중요했다. 16세기에 노예 판매세는 크림 항구에서 오스만 국고로 돌아오는 전체 세입의 29퍼센트를 차지했다. 평균 판매 가격은 금화 20개에서 40개 사이로, 이는 성인 한 명의 2~3년 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500년부터 1650년까지 폴란드, 러시아 영토, 카프카즈에서 흑해를 거쳐 거래된 노예 인구는 대략 연근 1만 명이 넘었을 것이다.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의 강제 이주에 비하면 낮은 수치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백인’ 노예 거래 규모로는 최대였다. / 210p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 튀르크스트림 가스관을 통한 유럽의 에너지 공급 등 흑해는 국제 정세의 바로미터가 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곳이다. ‘현재의 갈등을 단순히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야욕이나 서방의 확장 정책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 지역이 품고 있는 수천 년의 역사적 복잡성을 놓치게 된다’던 역자의 말처럼, 이분법적인 시각이나 진영의 논리를 넘어, 오랫동안 수많은 문명과 민족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해왔던 흑해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진중한 고찰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수록된 지도를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고 검색도 해가며 공들여 읽어야 했을 만큼 쉬운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700년이라는 흑해의 긴 역사를 아우르는 저자의 내공과 그 안에서 역사의 의미를 읽어내는 통찰력에 감탄하며 마지막 장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에 관한 새로운 영감과 지적 즐거움을 얻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