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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95
허먼 멜빌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8월
평점 :

바틀비는 나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가장 특별한 캐릭터 중에 하나가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부조리한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다룬 허먼 멜빌 문학의 정수!
“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세상에! 바틀비, 이 사람 어쩌면 좋지? 오늘도 기어이 고용주의 부탁과 명령에 ‘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하는 이 남자. 때로는 다정하게 설득해보고, 때로는 내쫓겠다고 윽박도 질러보건만 그는 오로지 필경사라는 자신의 본분에만 충실할 뿐이다. 심지어 어느 시점부터는 필경 일조차 내려놓고 특유의 파리한 얼굴로 우중충한 벽돌 벽만 바라보고 있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더욱이 무언가를 하지 않겠다는 그의 선언은 19세기 중반의 뉴욕이 배경인 현실과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태도와도 배치된다. 왜 그는 한사코 ‘하지 않기’를 택하는 걸까. 어째서 그는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사회의 질서를 거부하고 이해를 구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걸까. 그는, 대체 왜.
구인 광고를 보고 찾아온 그 젊은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병약해 보일 정도로 파리하지만 곱상한 얼굴, 누가 봐도 선한 느낌을 주어 오히려 연민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단정한 태도, 그리고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을 것 같은 쓸쓸한 인상! 바로 바틀비였다. / 「필경사 바틀비」 중에서 23p
그러고 보면 바틀비는 자기 삶에 대한 어떠한 적극성도 취하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소설은 끝끝내 바틀비가 왜 그러기를 택했는지 이렇다 할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다만, 고용주가 들은 어떤 짤막한 소문을 통해 짐작해 볼 뿐이다. 그 소문이란, 바틀비가 워싱턴의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에서 근무하다 조직 개편에 따라 갑자기 해고되었다는 것인데, 그의 일과라는 것이 배달되지 못한 죽은 편지들을 다루고 그것을 분류해 불길 속에 넣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수신되지 못한 편지 속에는 이따금 누군가를 돕는다고 보낸 지폐도 있고, 반지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 편지가 진즉에 닿았더라면 그 돈으로 오늘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용기와 희망을 가지라는 지인의 따뜻한 말에 다시 살아갈 힘도 얻었을 테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무용이 되어버린, 가닿지 못할 편지를 소각해야 했던 바틀비의 심정이란 어떠한 것이었을까를 상상해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택한 그의 태도는 삶에 대한 환멸과 허무함에 대한 한 인간으로서의 절규이자 반항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바틀비가 떠날 거라고 가정한 것은 정말 멋진 생각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건 내 생각이지 바틀비의 생각이 아니었다. 문제의 핵심은 내가 그가 떠나리라고 생각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라, 바틀비가 그럴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바틀비에게는 어떤 전제나 가정보다 그럴 마음이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 「필경사 바틀비」 중에서 58p
어디서도 한마디 말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철제 동물 같은 기계들이 움직이며 계속 나지막하게 뱉어 내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공장 안 분위기를 압도할 뿐,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인간의 목소리는 아주 멀리 추방된 것 같았다. 이곳에서는 인간들이 자신의 노예라고 호언장담하던 기계들이 보란 듯이 서 있고, 인간들이 비굴하게도 그 기계들을 섬기고 있었다. 노예들이 술탄을 섬기듯, 끽소리 못하고 굽실거리며 기계들을 섬기는 인간들. 기계의 부속품인 회전 기어? 아니, 이곳 처녀들은 그보다도 못한, 심지어 회전 기어의 이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다. / 「총각들의 천국, 처녀들의 지옥」 중에서 124p
「하지만 매일 하루 세끼 다 먹이는 건 아니잖소. 젤리가 걸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구호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냥 돈 좀 주고 사는 향료가 들어가지 않은 소고기나 빵 같은 것, 손이 많이 안 가고 간단히 해 먹을 수 있는 그런 게 더 낫지 않을까요?」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밍밍한 소고기나 빵을 먹지 않아요. 황제들, 섭정 왕세자들, 국왕들, 야전 사령관들이 그런 소고기나 빵을 먹겠습니까? 그래서 보신 것처럼 남은 음식이 다 저런 것들이죠. 혹시 국왕들이 남긴 빵 부스러기와 다람쥐가 먹다 남긴 부스러기가 같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 「빈자의 푸딩, 부자의 빵 부스러기」 중에서 170p




이 외에도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 속에는 허먼 멜빌이 쓴 여러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멜빌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문명이 발달한 현대 사회 속 불행한 타자를 둘러싼 문제,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윤리적 딜레마’라는 윤희기 역자의 말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부조리한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다룬 작품들이 인상적이다. 이제껏 허먼 멜빌의 대표작인 『모비 딕』만 알고 있거나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단편 소설집을 꼭 읽어보시라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