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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리 - 2024 공쿠르상 수상작
카멜 다우드 지음, 류재화 옮김 / 민음사 / 2025년 12월
평점 :

이제는 ‘잊고 싶은’ 역사가 되어버린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
지난한 폭력의 역사로부터 잃어버린 목소리를 회복하는 눈부신 역작!
이거 보여? 난 멈추지 않는 커다란 미소를 짓고 있어. 난 벙어리, 아니 거의 벙어리야.
얼핏 천진난만해 보이는 말투지만 누구라도 그녀의 ‘미소’를 보고 나면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마는 그 이름, 오브. 새벽을 뜻하는 그 이름처럼 그녀의 시간은 이십 년 전, 다섯 살이었던 1999년 12월 31일의 새벽녘에 멈춰버렸다. 그날 오브는 이슬람 무장단체의 습격을 받아 목이 그어지는 참극을 맞았지만 가족 중 유일하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충격의 여파로 성대를 잃고, 목에 삽입한 튜브로 호흡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다행히 지금의 엄마인 독신 여성 변호사 하디자에게 입양되어 현재는 해안 도시 오랑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며 살고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목에 남겨진 학살의 흔적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 오브를 향해 하디자는 곧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넌 한 권의 책이라고. 전쟁과 학살의 흔적을 이야기하는 살아 있는 증거라고.
“넌, 넌 한 권의 책이야.” 엄마는 내게 맹세하듯 말하곤 했어. “진짜 책.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이야기하는 책. / 20p
유일무이한 책이며, 성급한 살해 속에, 성급한 밤 속에 쓰인 책이라 할 나를. 망각으로부터 보호되어 알제리의 진짜 전쟁의 진짜 이야기를 지켜 내는 책인 바로 나를 말이야. 물론 넌 모르겠지, 하나의 삶 속에 얼마나 많은 자갈이 들어 있는지. / 36p
오랑은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야. 몇 년 전 신의 도살자들이 일으킨 전쟁의 흔적은 여기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나 말고는 말이야. 마치 탯줄처럼 감기고 풀리면서 널 감싸고 있는 나의 이 기나긴 이야기 말고는. 건물 아래서 행여 나와 마주차기라도 하면 나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것도 아마 그래서일 거야. 내 목의 구멍을 통해 알제리 내전으로 죽은 수십만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노려보는 것 같다고 느끼는 걸 눈치챘는지도 모르지. / 51p



하지만 침묵을 강요하고 비극의 역사를 지우려는 국가의 시도 앞에서 오브는 거슬리는 존재일 뿐이다. 꾸밈을 금지하는 남성 중심의 알제리 사회에서 그녀의 미용실 또한 경계와 적대의 대상일 뿐이다. 마치 예견된 미래처럼, 처참하게 유린당한 미용실의 흔적을 바라보며 오브는 여성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기만 한 이런 세상에서 과연 뱃속의 아이인 후리를 낳아도 되는지 깊은 의구심에 빠진다. 결국, 오브는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의 현실과 고통의 실체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학살의 현장이었던 고향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그렇게 상처의 근원 한가운데로 깊숙이 걸어들어감으로써 1999년 12월 31일에 멈춰버린 오브의 시계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때 난 다들 더 이상 우릴 기억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걸 깨달았지. 숫제 우리에게 우리의 기억을 의심해 볼 것을 요구했어. 온 나라가 그 상처를 치유하는 대신, 오히려 지우고, 의심하게 했지. 그리고 그걸 당연한 흐름으로 만들어 버렸어. 아, 그래 맞아!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의심하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점점 더,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내 목에 난 구멍이, 내 안에서 제 꼬리를 무는 그 언어로 말하는 것만큼 그건 그리 끔찍한 일이 아니었다고 믿으려 애썼어. 보다시피 기억이란 항상 물 위에, 모래 위에, 그러니까 변하고 흩어지는 물질 위에 쓰이는 거니까. / 155p
내 딸아, 설령 네가 우리처럼 대화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중요한 걸 말하기 위해서야. 이 나라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껄이고, 수다와 목소리로 넘쳐나지만, 중요한 건 너의 목소리야, 네가 속삭일 때조차. 하느님께서 너를 속삭임으로 만드신 건, 네가 말할 때 우리 모두를 침묵시키기 위해서야. / 260p
아무 손도 대지 않은 진실의 가장자리에서, 나는 마침내 몸을 던질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이번에는 내 속으로 잠수하듯 뛰어들어, 내 상처를 다시 열고, 꿰맨 자국을 뜯어야 했다. 그리고 내 ‘미소’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이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래, 네가 내게 목소리를 되돌려줄 거야, 난 속으로 속삭였다. 나는 한 권의 책이야, 행복한 결말을, 아니 적어도 진실한 결말을 찾고 있는. / 502p


소설 『후리』는 이른바 ‘검은 10년’이라 불리는 알제리 내전의 희생자와 생존자들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기록되지 못한 기억들을 문학이라는 언어로 회복한 눈부신 역작이다. 폭력과 권력은 얼마나 쉽게 개인의 아픔을 묵과하는가. 신앙이 정치와 결탁하면 얼마나 포악무도해질 수 있는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사는 것이 수치가 되어버린 생존자들의 고투와 상흔을 유려하고 시적인 문장으로 보듬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책을 적극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