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사계
손정수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품 속에 잠재된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비평의 힘!

새로운 시대와 공명하며 다시, 새롭게 읽는 고전 문학!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저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페미니스트 문학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새롭게 조명한다. 이들 저자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남자 괴물이 실은 위장된 여성”이라는 진단을 내놓으며, “괴물이 이름조차 얻지 못하고 아무리 애써도 사회의 일원으로 수용되지 못하는 모습은,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음에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 편입될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을 대변한다”고 설명한다. 십대 후반의 여성이 쓴 호러 작품이 새로운 시대에 따른 재해석을 거쳐 보다 너른 생명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고전의 사계』에서 손정수 평론가가 사용한 Palimpsest(팰림세스트)야말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매우 적확한 단어인 듯하다. ‘남아 있는 여백을 찾아, 혹은 이미 쓰여 있는 글씨를 긁어내고 거기에 새로운 이야기와 해석을 써넣는’ 것. 다시 말해 한 작가의 작품 세계라는 것은 온전히 작가 스스로가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가 어떠한 맥락에 따라 읽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정의를 달리하고 또 새롭게 창조될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프랑켄슈타인》에서부터 《로드》에 이르기까지, 고전의 사계를 사유하는 시간



  책에 수록된 스물두 편의 고전은 하나의 고전이 어떠한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독자들에게 다채로운 방식으로 수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를 통해 작가 개인의 내적 세계나 삶의 문제가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객관화될 계기를 얻고, 또 시대와 조응하여 인류 보편의 문제로 나아가는지 그 과정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큰 즐거움 중에 하나다. ‘고전 읽기’ 그 이상의 독서 경험을 얻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책에 주목해보시길 바란다.



메리 셸리가 자신의 무의식에 떠오른 어떤 이미지로 한 괴물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 작용한 여러 맥락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을 바라보도록 가해진, 부모와의 관계로부터 유래한 어떤 압력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자신을 형성하였음에 틀림없지만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그 힘을 대체로 직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메리 셸리의 글이 발휘하는 가치의 근원을 초자아와 대면하고자 했던 그녀의 의지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 <존재와 심연에 다가가는 두 가지 이야기 방식-프랑켄슈타인> 중에서 25p


두 인물이 각각 책으로 상징되는 정치(발렌틴)와 영화로 표상되는 대중문화(몰리나)를 의미한다고 본다면, 이 결합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사회적인 의미까지 띠게 된다. 이렇듯 그 시대의 상식으로는 좀처럼 넘어서기 어려운 성적, 정치적 관념의 장벽을 이야기 속에서 대담하게 해체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거미여인의 키스》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 <소설과 영화의 길항, 그 혼융의 형식에 담긴 현실과 꿈-거미여인의 키스> 중에서 71p











  비평집을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새로운 독서로 연결된다는 점인데, 그 중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읽는 자리에서 바로 구입해버린 책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바틀비’라는 독특한 캐릭터에 있다. 뉴욕 맨해튼의 월 스트리트 한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된 바틀비는 필경 일 말고는 다른 일은 “안 하는 편을 택”하여 모두를 당황스럽게 하는 인물이다. 이야기는 세속적인 유형의 변호사인 서술자와 필경사 바틀비 사이에서 펼쳐지는 단계적인 심리 게임으로 전개되는데, 결국 변호사는 어떤 인간적인 양심과 윤리적인 충동에 매번 갈등을 느끼며 바틀비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결정을 내린다.



  19세기 중반 소설의 인물이, 그것도 뭔가를 적극적으로 하는 것과는 정반대편에 있는 바틀비라는 인물이 불러일으키는 지극히 예외적이고 아이러니한 감정은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손정수 평론가는 ‘쓰는 사람’으로서 필연적으로 짊어져야 했던 허먼 멜빌의 고통,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에 대한 은유가 바로 ‘바틀비’라고 지적한다. 적어도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길로는 안 가는 편을 택했던 바틀비처럼, 비록 세상에 인정은 받지 못했어도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에 몰두했던 허먼 멜빌에게서 자신이 갈 수밖에 없는 길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인간의 자세를 엿보는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앞서 호손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저는 다른 식으로는 또 쓸 수가 없습니다”라는 구절에서는 바틀비의 어투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불안하고 어두운 예감이라기보다 자신이 갈 수밖에 없는 길을 겸허하게 수용하겠다는 선언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길로는 안 가는 편을 택하겠다는 ‘수동적인 저항’의 태도로 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것이 허먼 멜빌을 《모비 딕》과 《필경사 바틀비》의 작가로 만들었고, 그의 작가로서의 비참과 영광을 낳았던 것이다. / <수동적 저항의 글쓰기가 남긴 비참과 영광-필경사 바틀비> 중에서 94p


아쿠타가와의 원고는 잇대어 붙인 부분, 글자를 고치거나 지우거나 끼워넣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원고지 위에서 싸움이라도 벌인 것처럼 장렬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붓 가는 대로 술술 써내려가지 못한 탓에 몇 장이나 고쳐 쓴 부분도 있었다. 잘못 쓴 원고는 완성된 원고보다 매수가 훨씬 많았다. 아쿠타가와는 그걸 찢어서 없애지 않고 다시 책상 가장자리에 놓아두었다. 나쓰메 소세키 선생도 잘못 쓴 원고를 버리지 않고 간직했던 모양이니, 그에게 배웠는지도 모른다.


‘싸움이라도 벌인 것처럼 장렬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원고지’만큼 작가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다. / <잘못 쓴 원고를 버리지 못하는 마음으로 쓴 이야기-라쇼몬> 중에서 125p



1942년 10월 23일자의 ‘작가수첩’에서 카뮈는 “《페스트》는 사회적 의미와 동시에 형이상학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똑같은 것이다. 이런 애매성은 《이방인》의 애매성이기도 하다”고 썼는데, 그러니까 ‘페스트’라는 현상을 ‘나치 점령’이라는 사회적 차원과 ‘삶의 모순’이라는 형이상학적 차원에 동시에 대응되는 이중적 알레고리로 제시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던 것이다. / <‘페스트’라는 알레고리의 리얼리티-페스트> 중에서 215p












  한 시대의 삶의 현장 한복판에서 우발적으로 탄생했지만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그 시대적 문제에 맞서는 생생한 현실성과 폭발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같은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 유효하게 읽힌다. 당대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현재의 시선으로 재독하고 계속해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인간 보편의 문제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의 사계』로 하여금 고전을 즐기고 그 속의 여러 가치들을 향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이 책을 추천드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