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 뷔페
류즈위 지음, 김이삭 옮김 / 민음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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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억압과 상처의 족쇄를 예민하게 포착해낸 작품!

불안과 억압 그리고 트라우마로 점철된 ‘여성’이란 이름의 모든 언어들!






  다행이었다. 딸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류즈위의 단편소설 「동창회」에서 주인공 자스민은 모든 게 꿈이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온몸이 격렬히 떨리는 충격으로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 정신 차려. 네게는 딸이 없어! 이미 남편과는 결혼 전부터 아이를 낳지 않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자신을 성폭행한 선배가 꿈에 나타나 휴대전화 속의 딸 사진을 들여다보려하자, 딸을 지켜야 한다는 어떤 절박함에 강렬히 사로잡혔다. 내. 딸. 을. 만. 지. 지. 마. 실제로 그 소리를 내 뱉었는지 아니면 마음속으로만 폭발하듯 터뜨렸는지 깨닫기도 전에 꿈에서 깨어나지만, 여운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껴안든 실천하든, 

심지어는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여성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 / 

「강가 모래섬에서」 중에서 120p




  『여신 뷔페』는 타이완 페미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류즈위의 단편소설집이다. 일단 이 책의 제목이 눈길을 끄는데, 여성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 먹는다는 뜻의 페미니즘 백래시 표현인 ‘여권 뷔페’의 변형어라고 한다.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을 향한 대립이 보다 극렬해지고 있는 현상을 반영하듯, 작가 류즈위는 여덟 편의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의 여성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투명하게 직시한다. 우리 사회가 어떤 언어로 여성을 묘사하는지, 그들의 삶을 어떻게 제한하는지, 때로는 여성 스스로가 가해자이자 공모자가 되기도 하는 현실까지 다소 발칙하고 도발적인 언어로 재현한다.




여자의 울음은 어떤 울음이든 참된 감정이 아니라 히스테리일 뿐이니까. 그녀는 울 수 없었다. / 「남의 아이」 중에서 89p



“남성이 바라는 이상형의 역할을 여성이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문화적 속박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성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전형적인 역할에서 벗어났을 때 수반되는 결과를, 그 책임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 「강가 모래섬에서」 중에서 98p











  「강가 모래섬에서」의 주인공 샤오뤄는 대학에서 페미니즘을 강의하며 남녀의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지만, 자신의 젊은 연인 앞에서는 넓어진 모공과 잔주름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기검열에 매달린다. 학식과 경력을 얼마나 쌓았건 간에 마흔 둘과 스물 다섯 사이에 존재하는 나이 차는 계급으로 작동할 뿐이다. 데이트 상대를 기쁘게 해줘야 한다고 느끼며 상대에게 모든 걸 맞추는 리즈(「리치 사용 설명서」), 늦은 밤 택시 기사가 자신의 몸매를 칭찬하자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리는 항아(「항아는 응당 후회하리라」), 업무 결과가 안정적이며 팀원을 이끄는 능력이 탁월하지만 사내 진급 경쟁에서 남성 직원에게 밀려나고 마는 메두사(「여신 뷔페」), 이 여성 화자들은 불안과 억압 그리고 트라우마로 점철된 ‘여성’이란 이름의 모든 언어들이다.



선생님은 자기 몸을 느끼면서 자기 내면을 바라보라고 했지만, 사실 그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껏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언하오에게 줄 정교한 선물을 다듬고 있는 거라고 상상할 수는 있었으니까. / 「리치 사용 설명서」 중에서 157p


가정 수호와 아이 사랑의 깃발을 내세우면서 성평등 교육에 반대하는 단체들을 이제껏 혐오해 온 리즈였지만, 성교육은 반드시 일찍 시작해야 한다고 늘 주장해 온 리즈였지만, 지금은 그들의 마음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 아이와 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들이 성교육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심지어는 자기 아이가 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영원히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부모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 「리치 사용 설명서」 중에서 164p



“내가 쟤를 도와주는 게 이번이 세 번째야.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양해해 준 거 아냐? 내 사정은 누가 알아주는데? 다른 사람한테 피해 줄까 봐 걱정했다지만 결국 피해 준 건 사실이잖아. 나는 나중에 결혼해도 아이는 절대 안 낳을 거야. 이거야말로 남한테 피, 해, 를, 안, 주, 는, 거, 라, 고. 알겠어?” / 「여신 뷔페」 중에서 175p



전동 유축기 전선으로도 자살을 할 수 있나? 대체 어떤 마음을 먹어야 그렇게 죽지? / 「여신 뷔페」 중에서 225p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결국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이라서 상당히 몰입해서 읽었다. 한편, 이미 나는 이들의 언어를 써왔고, 또 쓰고 있으며,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는 현실로 인해 읽는 내내 힘겹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언어를 써나가기를,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이 책을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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