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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떠나는 수밖에 - 여행가 김남희가 길 위에서 알게 된 것들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25년 5월
평점 :

길이 내게 알려준 것들!
이 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2003년부터 시작해 23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행하는 삶을 살아온 김남희 작가의 여행에세이다. 무려 23년 동안 길 위에서 여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건 어떤 마음인 걸까. 낯선 세계에 나를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일종의 도전 정신 같은 걸까, 변화와 새로운 순간을 갈망하는 호기심 같은 걸까. 고행과 타협, 적응을 수없이 반복해야 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일단 떠나 보자’ 하고 나설 수밖에 없는 마음의 동력이란 대체 무엇일까 궁금했다.
여행을 통해 어떤 곳에 머문다는 건,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기울여 그곳의 자연이나 사람들과
이어지는 일이다. / 337p
그런 나에게 책은 이렇게 답한다. 여행은 무수한 발자국을 이곳저곳에 남기면서 우리 모두의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여행지를 기억하게 되는 건 그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영위해온 사람들의 흔적이자, 평소 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소수자들, 경계인들)의 목소리이자, 낯선 여행자들에게 내미는 그들의 호의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인지 중앙아시아와 유럽, 남미를 아우르는 이 책의 여정 속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뜻밖에도 사람이었다. ‘사람들 사이의 좁은 거리를 견디지 못해 밖으로 돌다가, 그렇게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보려는 사람이 되었다’던 그녀의 고백처럼, 결국 홀로는 살 수 없다는 감각 같은 것이 우리를 더 다정하게 만들고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끔 하는 게 아닐까.
일에 찌든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마음을 다해 손님을 대접한다. 키우는 가축을 돌보는 태도도 다정하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만, 돈이 결코 전부가 아닌 사람의 태도다. 자신이 하는 일이 결국 살아 있는 존재를 향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이의 존엄이 그녀에게 배어 있었다. 그 집을 떠나던 날, 안젤리카는 마당의 포도와 사과, 직접 구운 케이크와 과자를 가득 담아 건넸다. “우리의 첫 한국인 손님이 되어줘서 정말 기뻤어”라는 말과 함께. / 53p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걷느냐가 더 중요하니까. 순례자들의 전용 숙소인 어느 알베르게 벽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우정보다 귀한 카미노는 없다.”
걷기에 급급해 그녀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모른 척했다면 제대로 카미노를 걸었다고 말하기에 부끄러울 것이다. 그녀 또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로지 혼자 힘으로 걸어야 했다면 좀 서글프지 않았을까? 지금껏 여덟 번 카미노를 걸었지만 다리에 힘이 남아 있는 한 계속 걷고 싶은 이유는 바로 길 위에서 만나는 순례자의 열린 마음 때문이다. / 146p




나에게 있어 여행은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일에 가까웠다. 마치 미션에 몰두하듯 다녀온 것에 보다 의미를 두었다. 이곳보다 저곳이 좋았던 이유는 무엇인지 비교하면서 즐거움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쌓아가는 것 역시 여행이라 생각했다. 이런 나에게 작가는 20년 동안 질리는 일 없이 여행만 하며 살 수 있었던 비결을 ‘어제 본 것은 다 잊고, 오직 지금 눈앞에 있는 것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제 이구아수 폭포를 봤다고 오늘의 정방 폭포를 시시하게 여기지 않는 것, 눈앞의 풍경에 오롯이 몰두하며 주어진 것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것, 지금 내가 보는 풍경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장면이라 여기는 것. 무엇이든 불편함을 통과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어떤 시간과 장소가 있고, 그럴 때만 느낄 수 있는 어떤 결의 감정과 사유가 있다는 여행자의 태도가 내게도 필요하다.
아무렇지 않던 것들,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원래 지닌 고귀한 가치를 알려주는 땅이었다,
그곳은. / 24p
이 책을 읽으며 낯선 여행지에서의 불안과 불편이 타인의 온기와 친절로 회복되는 순간들을 자주 목격했다. 현지인의 삶을 훼손하지 않는 여행을 위한 질문과, 기후 위기의 심각성 속에서 지속가능한 여행에 대한 고민을 놓치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 모두의 삶이 이토록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감각할 수 있었다. 길 위에서의 사유와 경험을 나누어준 그녀의 글 덕분에 마치 아주 오랜 여행을 하고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책을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