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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25.3.4 - no.59 ㅣ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3월
평점 :

문학이라는 단단한 지대를 밝고 선 기분이란 건 이런 것이다!
애써 수고로움을 들여 정성을 다해 무언가를 보존하려는 마음들에 대하여!
* 피클링: 피클 만들기. ‘저소비 코어’를 이끌고 있는 잘파 세대가 배달 음식 소비를 줄이고자 보관 기간이 긴 절임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이 유행하며 알려진 말.
왜 피클링인가. 비건 레시피를 소개하는 비건 인플루언서 정고메는 <수고로움으로 절여지는 소중한 것들>이라는 칼럼에서 ‘피클링이란 신맛을 바탕에 두고 단맛과 짠맛의 균형을 맞춘 절임 물에 채소를 보존하는 요리 방식’이라고 소개한다. 산성화된 환경으로 미생물의 활동이 억제되면서 채소가 물러지지 않고 고유의 식감과 풍미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숙성 과정을 통해 한층 부드럽고 깊은 신맛을 이끌어내는 요리법이다. 단순히 신맛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넉넉해진 제철 채소들이 빛을 잃기 전에 절임 물에 담가 둠으로써 오랫동안 계절을 즐길 수 있도록 한 삶의 지혜가 여기에 녹아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지키고 보존하려면
절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 51p
이렇게 피클링에 대해 알고 보니 “애써 수고로움을 들여 정성을 다해 무언가를 보존하려는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는 것은 감정적 경험을 거의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던 이서수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책이야말로 일상과 기억, 감정과 경험을 켜켜이 담아 보존하려는 우리의 마음과 자연히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 덕에 우리는 누군가가 써놓은 책 한 권의 힘으로 삶의 생기를 되찾고 회복할 수 있는 마음의 자원을 얻게 되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혹시… 매번 시간을 들여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나의 수고로움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면, 나는 지금 책으로 하여금 내 안에서 절여진 생각들을 하나의 글로 정리함으로써 ‘나’라는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피클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쇼츠, 릴스, 2배속 시청처럼 점점 더 빨리 얻고, 소비하는 일에 익숙해진 요즘 세태에 이토록 성가시고 귀찮을만큼 긴 문장의 글을 쓴다는 건 어쩐지 미련해보이지만, 이 정성이 나를 조금 더 성숙하게 만들 것이라 믿기 때문은 아닐까. 느리지만 정성껏 시간을 들이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이번 호의 주제가 여느 때보다 크게 와 닿았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번 호에서는 소설가 정수읠의 「이 시점에 문필로 일억을 벌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와 남의현의 「공과 놀이와 공놀이」를 인상 깊게 읽었다. 전작의 경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문학이라는 언어가 행정이라는 언어와 만나면 곧잘 무기력해지고 마는 현실이 냉랭하게 파고든다. 글로 벌어먹고 살기 힘들지, 라는 말을 나도 한때 밥 먹듯 하고 다녔으니까. 후작에서는 필사적으로 엄마가 죽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써내려가는 아이가 등장하는데, 그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동안 정작 번번이 죽임을 당한 건 엄마가 아니라 아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무거운 마음을 느끼게 된다.
“내가 너에게 공을 주면, 네가 다시 나에게 공을 주는 거야.”
“왜요?”
“그런 놀이야.”
놀이? 노올이이? 노오올이이이? 나는 그 단어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되뇌었다. 처음으로 내가 공을 던질 수도 있다는 것을, 또 부모와 놀이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남의현 「공과 놀이와 공놀이」 중에서 148p
“그러면 저랑 캐치볼 하러 가요.”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런 즐거움들은 언제나 언젠가는, 이라는 형태로 나에게 다가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멀어져갔다. 이후로 나는 틈만 나면 엄마에게 캐치볼을 하러 가자고 졸랐고 처음에는 엄마에게서도 “언젠가는”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몇 번이고 그와 같은 대답을 듣고 나서, 나는 참지 못하고 야구공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 남의현 「공과 놀이와 공놀이」 중에서 151p
매번 느끼지만 항상 새로운 키워드로 다양한 종류의 글을 마주할 수 있다는 건 큰 즐거움인 것 같다. 다음 호에서는 또 어떤 주제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