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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 헤드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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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이 폭발한다, 이건 그냥 괴물 같은 소설이다!
다중추리와 거듭된 반전, 충격적인 설정으로 어디까지 나아갈지 종잡을 수 없는 극한의 상상력!
『엘리펀트 헤드』가 국내에 출간되었을 당시, “악마 같은 소설”이라는 평가가 다수를 이루며 이 책만큼은 한사코 스포를 막으려는 독자들의 반응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순전히 독자들의 반응 때문에 이 책을 구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을 읽은 뒤의 나 역시 그들의 반응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 이건 그냥 괴물 같은 소설이라고, 정말 미친 작품이라고.
극한의 상상력이 폭발한다
가가조 의과대학 부속병원 정신과에서 환자를 진료한 지 23년째, 정신과 의사인 기사야마 세이타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 스스로는 의사로서 확고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은 물론, 배우인 아내와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큰딸, 지병에도 아랑곳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작은딸과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인생을 몇 번 다시 살아도 이렇게 멋진 가족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런 행복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기사야마는 격렬한 불안에 휩싸이곤 한다. 어딘가에 작은 균열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단 하나의 균열이…….
가족을 지키려면 어떤 균열도 방치해서는 안 된다. / 109p
이따금 이런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평온한 나날이 지속되고 어쩐지 하는 일마다 순조롭게 진행되어갈 때쯤이면, 언제 이 일상이 흔들릴지 모른다는 추락에 대한 불안 같은 것. 『엘리펀트 헤드』는 어떻게 해서든 가족의 평화를 지켜야겠다는 한 정신과 의사의 과도한 신념에서 비롯된 범죄 내러티브를 기반으로 이러한 공포가 한계에 치닫으면 이야기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극한에 극한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미스터리 소설이다. 여기에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다중세계와 타임 패러독스를 인용한 특수설정, 망상과 의식의 분열, 그 안에서 거듭되는 다중추리와 반전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작가의 필력까지… 독자가 무엇을 상상하건 미스터리 장르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치를 이 작품에 아낌없이 쏟아 부은 느낌이다.
“소문은 들었어요. 수상쩍은 이야기뿐이었지만요. 너무 큰 쾌락 때문에 살아갈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거나, 자신의 뇌를 긁어서 꺼냈다는 것도 그중 하나죠.” / 264p
“선생님은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다중세계 해석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이 세계의 온갖 일은 여러 가능성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합니다. 선생님은 오늘 아침 분홍색 넥타이를 고르셨지만, 옆에 있는 노란색 넥타이를 고른 선생님도 동시에 존재하죠.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촌스러운 네이비색 넥타이를 고른 선생님도 있어요. 책상 화분에는 파리지옥이 심겨 있지만, 파인애플과인 브리세아가 심긴 세계도 있죠. 스피커에서 코카인 베이비스가 아니라 디즈니의 오르골이 흘러나오는 세계도 있고요.” / 3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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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야기의 흐름상 필연적인 설정이었을지라도 우라시마라는 인물은 상당히 비현실적이어서, 섬세하고 완벽한 논리로 앞선 추리를 반박하고 깨부시고 나아가야 하는 다중추리만의 흥미로운 매력을 일부 손상시킨 듯한 아쉬움을 남긴다. 또 가학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설정 역시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미스터리 장르가 지닌 특수성과 마지막까지 도파민을 아낌없이 폭발하게 하는 상상력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가타부타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읽어보시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작품은 참 오랜만이다. 참고로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내 뇌가 분열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될 테이 마음 단단히 먹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