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홀 2 - 맨부커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작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2
힐러리 맨틀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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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수준 높고 세련된 정치 드라마를 이제야 만났다!

갖은 위협과 모욕으로부터 철저하게 감정과 얼굴을 단속해가며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해야만 하는 정치가로서의 숙명과 분투!






이건 난치성 싸움꾼들의 세계, 

사체로 달려드는 늑대와 그리스도교도를 놓고 싸우는 

사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다. 

그 안에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그대여, 얼굴을 단속하고 또 단속하라.





  『울프홀』 2권은 헨리 8세 치하의 권력 핵심이었던 울지 추기경이 실각한 뒤, 그를 보좌하던 크롬웰이 헨리 8세의 지지와 신임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국정 전반을 장악해가는 과정을 그려나간다. ‘크롬웰을 도와라, 그럼 그도 당신을 도울 것이다. 충성하라, 성실히 임하라, 그를 대신해 기지를 발휘하라. 그럼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를 헌신적으로 섬기는 자는 출세하고 보호받을 것이다.’ 라던 프랑스 대사의 묘사에서 알 수 있듯, 이제 크롬웰은 법안을 상정하고 왕과 왕실의 자금을 관리하는 것은 물론, 수도원을 개혁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폐쇄할 권한까지 거머쥐며 막강한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미천한 신분인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 왕실의 최상층에 오르는 이 신분 상승 스토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잔인하고 교활한 성격으로 묘사되었던 여타의 작품과 달리, 행정의 귀재로 중세 궁정의 복잡한 정치사를 타협 없이 이끌어갔던 토머스 크롬웰의 유능함과 명민함에 주목한 점도 극의 몰입도를 더한다. 갖은 위협과 모욕으로부터 철저하게 감정과 얼굴을 단속해가며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해야만 하는 정치가로서의 숙명과 분투를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해낸 작품이 또 있을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신랄하고 날카롭게 권력의 구조와 속살을 샅샅이 탐색해가는 힐러리 맨틀의 필력 덕분에 우리는 진정 수준 높고 세련된 정치 드라마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왕이 원하는 건 쟁기를 끌 황소가 아니다. 왕의 총애를 놓고 벌이는 전쟁에서 정면으로 승부하고 부상당하고 불구가 되기를 자처하는 야생의 짐승이다. 그가 가드너와 잘 지낼 때보다 그러지 못할 때 국왕과의 관계에서 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음은 불 보듯 뻔하다. 분열시켜 지배하라. / 58p


그러나 자기정당화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구구절절 설명해서 좋을 것도 없다. 옛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나약한 것이다. 과거는 감추는 것이 현명하다. 설령 감출게 전혀 없더라도. 사람의 힘은 어스름 속에서, 보일락 말락 하는 손의 움직임에서,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표정에서 나온다. 엄연히 있어야 할 사실이 빠져 있을 때 사람들은 겁을 먹는다. 당신이 벌려둔 간극에 자신의 공포와 망상과 욕망을 쏟아붓는다. / 115p


세상을 움직이는 건 성벽 안이 아니라 회계실이고, 나팔소리가 아니라 주판알이 딸깍거리는 소리고, 총포 장치가 긁히고 딱딱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그 총포와 제작업자와 화약과 탄환의 값을 치를 약속어음에 깃펜으로 서명하는 소리라고. / 143p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그랬다는 거요?” 그가 묻는다. 그녀는 동의한다. 맞아요, 실망시킬 수 없어요. 일단 시작하면 계속 가는 수밖에 없어요. 돌아가려고 하면 저들이 도륙할 테니까. / 318p


사람들의 운명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좁은 방안의 두 남자에 의해. 대관식도, 추기경단의 교황 선출 회의도, 화려한 볼거리도, 행렬도 잊어라. 세상은 이런 식으로 바뀐다. 테이블 위를 오가는 수판, 깃펜의 놀림 한 번으로 달라지는 구문의 위력, 한숨을 쉬며 지나는 여자와 공기 중에 길게 남은 오렌지 꽃잎 혹은 장미수의 향기. 침대 커튼을 당겨 닫는 그녀의 손, 살과 살을 맞대며 내는 은밀한 신음이 세상을 바꾼다. / 475p












  앤 불린과 헨리 8세를 중심으로 왕실의 치정과 애욕에만 집중하다보면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을 발견하기 어렵다. 도륙당하지 않으면 도륙해야만 하는 비정한 현실 속에서 수장령( 영국 국왕을 영국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하는 법)을 관철시키려는 자(크롬웰)와 막으려는 자(토머스 모어)의 집요한 수 싸움이야말로 2권에서 가장 압권인 장면이니 이에 주목해 읽어보시길 바란다. ‘메리’, ‘토머스’라는 이름의 주인공들이 대거 등장해 야바위하듯 정신을 혼란케하고, 낯선 중세 영국사가 또 한번 나를 압박하니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지만, 그래서 그 곤란함을 너끈하게 이겨낼 수 있었더라면 훨씬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래도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시체’가 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크롬웰과 앤 불린의 대결이 다음 작품인 『시체들을 끌어내라』를 통해 이어진다고 하니 이 역시 서둘러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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