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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전나무의 땅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7
세라 온 주잇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5/0123/pimg_7111301704580495.jpg)
자기 몫의 삶을 일구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잔잔하지만 그 안온함에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소설!
‘고아하다’는 표현만큼 이 책과 어울리는 말이 또 있을까. 뾰족한 전나무가 늘어선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더닛 랜딩’을 배경으로, 자연과 합일하여 작지만 단단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시종 섬세하고 우아한 필치로 엮은 작품이다. 특별한 주인공이나 어떠한 극적인 사건도 없지만, 작가인 세라 온 주잇은 자기 몫의 삶을 일구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말로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마을과 그 주변을 진심으로 알아가는 것은
꼭 한 사람과 관계를 다지는 일처럼 느껴진다. / 9p
어느 6월 저녁, 한 승객이 홀로 증기선 선착장에 도착한다. 메인주 동쪽 바다에 접한 바닷가 마을 더닛 랜딩에 마음이 이끌린 승객은 이곳에서 하숙하며 여름 한 철을 보내기로 한다. 약초 전문가인 토드 부인의 아담한 집에서 하숙하게 된 이 손님은 마을 사람들과 하나둘씩 안면을 틔우며 더닛 마을이 주는 아늑한 느낌에 점차 동화되어간다. 그렇게 소설은 한 이름 모를 화자의 시선에 포착된 마을 풍경과 이곳에 뿌리 내린 존재들, 살며 사랑하며 고유의 서사를 쌓아나가는 생의 면면들에 주목한다.
토드 부인이 우리 이웃의 역사를 전부 이야기해주었다. 같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인의 말을 빌리자면 “저마다 고생을 잔뜩 하고 그 고생의 명암을 전부 깨우칠 때까지” 함께했다. / 23p
“올바른 방향으로 진실을 추구하지 못했어요. 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요. 날 비웃는 사람들은 내 사상이 얼마나 굳건한 근거에 기반하는지 잘 몰라.” 선장은 저 아래 마을을 향해 손을 저었다. “저기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우주를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지요.” / 30p
이렇게 삭막한 환경에서는 분명 오후의 방문과 저녁의 잔치가 드문 계절이 있을 터였으나 블래킷 부인은 자기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단순한 자기 이해를 넘어서서 한 사람이 사회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자기만의 몫을 감사히 여겨온 사람이었다. / 66p
뾰족한 전나무로 둘러싸인 정상에서 섬 전체를 내려다보고, 이 섬과 조금씩 엿보이는 다른 수백 개의 섬을 둘러싼 바다, 육지의 해안과 저 멀리 수평선까지 조망했다. 문득 광막한 세상을 감각할 수 있었다. 그 어떤 것도 시야를 막거나 몸을 에워싸지 않았으니까. 탁 트인 곳에서는 어김없이 이런 자유로운 시공간적 감각을 느끼게 되는 법이다.
“세상에 이렇게 풍경 좋은 곳은 없을걸요.” 윌리엄이 자랑스레 말했고, 나는 서둘러서 진심 어린 찬사를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한 번도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는 꼬마에게 어울리는 말이었지만, 나고 자란 거친 땅을 소중히 여기는 그를 보면 누구든 애틋함을 느꼈을 것이다. / 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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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전나무의 땅』이 빛나는 지점은 더닛 마을의 사람들에게 있다. 화자는 약초를 이용해 주변 사람들의 아픔을 돌보는 토드 부인에게서는 사려 깊은 마음을, 리틀 페이지 선장에게서는 뱃사람 특유의 원대하고 용감하며 진득한 성정을, 블래킷 부인에게서는 서로가 절실한 이웃들에게 부족한 것들을 돌봐주려는 다정한 이타심을 엿본다.
그 중에서도 작은 섬에 홀로 틀어박혀 은둔자의 삶을 선택한 조애나가 눈길을 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고 품었던 끔찍한 생각 때문에 신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 조애나는 평생 홀로 살기로 작정하는데, 이 가엾고 기구한 운명에 사로잡힌 여인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삶을 향한 고집스러운 신념과 독립성을 향한 용기에 삶을 수용하는 또 다른 방식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그들 나름의 사연과 생각을 지닌 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다. 덕분에 독자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을 소중히 여기고, 자기에게 주어진 몫을 감사히 여기면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봐, 역사를 공유하는 오랜 친구와 이야기하는 건 참 즐거운 일이라니까. 요즘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 같은 낯선 사람들이 참 많이 보여. 대화는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하는 말마다 부연 설명을 해야 하고, 그러면 사람이 기진맥진해지고 말아.” / 95p
“지난번에 이 길로 왔을 때 이 나무가 풀이 죽어서는 축 처져 있더라고. 다 자란 나무들은 그럴 때가 있어. 사람이랑 똑같아. 그러다가도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운 방향으로 뿌리를 내려 용감무쌍한 정신으로 다시 살아가기 시작해. 물푸레나무는 이따금 우울에 사로잡혀. 다른 나무들처럼 굳세지 못해서.” / 143p
“바위를 뚫고 자라나는 건강하고 씩씩한 나무도 가끔 있지.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거야.” 토드 부인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헐벗은 돌투성이 언덕 꼭대기 같은 곳, 기름진 흙이라고는 싹싹 그러모아도 외바퀴 수레 하나 못 채우는 곳에서 바싹 마른 여름을 지나면서도 푸르른 우듬지를 자랑하지. 돌에 귀를 대보면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릴 거야. 그런 나무는 자기만의 샘을 지니고 있거든. 그런 나무를 똑 닮은 사람들도 있고.” / 1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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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언덕 위에서 바다 너머의 수평선을 바라보듯 휴식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잔잔하지만 그 안온함에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소설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한 즐거움을 찾고 싶은 날엔 이 책이 많이 생각날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