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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세계사 - 세계를 뒤흔든 결정적 365장면 속으로!
썬킴 지음 / 블랙피쉬 / 202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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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이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365일, 최고의 역사 스토리텔러 썬킴이 들려주는 세계사 이야기!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역사 강사인 썬킴의 신작이다. 전작인 『썬킴의 세계사 완전 정복』,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 에서 유쾌한 스토리텔링으로 세계사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했던 그가 이번에는 세계사의 결정적인 장면들을 365일로 즐길 수 있는 책을 선보인다. 1863년 1월 1일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을 시작으로, 1650년인 12월 31일 청나라의 실권자인 도르곤(청나라의 실권자로 명나라를 무너뜨린 뒤 베이징으로 입성할 때 조선의 소현세자를 데리고 감)의 사망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주요 사건들을 하루 한 장으로 익힐 수 있어 흥미롭다.
세계사 속 운명의 그날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내가 태어난 5월 11일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60년 5월 11일은 아르헨티나에서 도피 중이던 ‘유대인 도살자’ 아돌프 아이히만이 체포된 날이다. 나치 장교로 총 실무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무려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주범이다. 그는 독일이 패망한 후 미군 수용소에 잡혀 있다가 탈출에 성공해서 남미 아르헨티나에 몰래 숨어들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이 애인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였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떠든 것이 이스라엘 정보 당국에까지 알려졌고 결국 아이히만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체포되면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난 공무원이었고 국가가 시키는 대로만 했다. 난 죄가 없다.”라고. 아이히만의 결말을 보며 지금,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봉사해야 할 공무원의 신분으로 자신의 안위만 챙기느라 양심을 저버린 분들은 뭔가 느끼는 바가 있지 않으신지 묻고 싶다.
1962년 1월 28일,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한 전형필 선생이 사망한 날이다_
전형필 선생은 ‘왜놈들이 우리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지고 나가는 걸 볼 수 없다’란 신념하에 개인 돈을 털어 우리 문화재를 싹 다 사들인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까지 연다.
전형필 선생 최고의 업적은 사라진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한 것. 한글의 창제 원리, 과학적 근거 등을 설명한 책이다. 이전에는 한글이 있기는 한데…… 세종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일제와 ‘누가 먼저 해례본을 찾나’ 경쟁에 들어간 전형필 선생! 결국 일제보다 먼저 해례본을 손에 넣게 된다! / 37p
1943년 2월 22일, 독일에서 반나치 단체인 백장미단의 단원들이 처형당했다_
모든 독일 국민들이 다 나치를 지지한 건 아니다. 양심적인 독일인들도 분명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뮌헨대학교 학생들과 교수로 구성된 백장미단이었다. 폭력적으로 저항하지도 않았다. 나치의 만행을 적은 전단지를 돌린 것이 다였던 철저한 비폭력 단체였다.
뮌헨대 학생이었던 한스 숄 그리고 그의 여동생 소피 숄이 주도를 했는데, 한스가 당시 읽고 있었던 스페인 소설 《백장미》에서 이름을 따왔다. 나치는 이들 대학생들을 검거한 후 바로 사형을 집행했다. 처형당한 소피 숄은 겨우 22살이었다.
지금도 독일 뮌헨대학교에 가면 캠퍼스에 이들의 비폭력 저항 정신을 기리는 조형물이 있다. / 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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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가장 눈길을 끈 것은 ‘1847년 4월 10일, 황색 언론 혹은 찌라시라고 불리는 저질 언론을 탄생시킨 조셉 퓰리처가 태어났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우리가 아는 그 퓰리처? 진짜? 헝가리 출신의 퓰리처는 미국에서 우연히 한 신문사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기자로 명성을 날리다 사업 수완이 좋아 차츰 경쟁 신문사까지 하나둘 인수했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뉴욕 월드>였다. 그런데 마침 윌리엄 허스트라는 경쟁자가 <뉴욕 월드>에서 연재 중이던 ‘황색 아이’란 만화의 만화가를 거액을 주고 스카우트 해 <모닝 저널>에서 연재하는 일이 벌어졌고, 화가 난 퓰리처는 다른 만화가를 고용해 계속해서 ‘황색 아이’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두 신문사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두 신문사는 연일 자극적인 저질 기사들을 경쟁적으로 마구 쏟아내었다. 저질 언론, 즉 황색 언론을 탄생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다행히 말년에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퓰리처는 자기가 번 돈을 ‘참 언론인’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한다. 이때 만든 것이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퓰리처 상’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역사란 자기반성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아닐까. 끊임없는 자기반성… 지금의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1492년 10월 12일,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대서양에서 헤매다가 지금의 서인도제도에 상륙했다_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1492년 ‘인도 찾아 삼만 리’ 여정에 들어간다. 문제는 인도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는 몰랐던 것. 가도 가도 안 나오니 서누언들이 반란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콜러버스는 조금만 더 가 보자며 설득했다. 왜? 인도에 도착해서 엄청난 향신료를 싣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떼부자가 될 생각을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지.
그렇게 겨우겨우 지금의 서인도제도에 도착했다. 그곳을 인도로 착각하고 선주민들을 ‘인디오(영어로는 인디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표류한 그곳을 인도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지금의 미 대륙의 선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건 옳지 않다. / 3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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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고. 따로 떼어놓고 보면 다른 이야기 같지만 역사는 모든 게 연속이며 그 때문에 과거는 현재를 구할 수 있다. 어느 하루도 가볍지 않은 날이 없으며, 그 하루하루의 엄중함에 우리는 모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생각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가. 이 시간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