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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 - 오답노트 같았던 삶에 그림이 알려준 것들
이유리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1월
평점 :
미술에서 생의 부조리와 아름다움을 찾고,
일상을 환기시키는 여러 질문들에 다가가는 시간!
스위스의 화가 프랑수아 바로의 그림 <빵 자르는 사람>을 보는 순간, 덜컥 큰 덩어리 같은 것을 삼킨 기분이 들었다. 그림 속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뜨거운 수프가 놓인 식탁에서 엄마와 딸이 마주하고 앉아 있는데, 턱을 손으로 괸 채 고개를 돌린 딸의 표정이 샐쭉하다. 빵을 자르는 엄마의 평온해 보이는 표정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아니, 엄마는 애써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일지도…. 이 그림이 이토록 신경 쓰이는 건 나에게도 이러한 순간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집돌이었던 큰 아이가 친구들과 놀러 나간 뒤에는 하루 종일 감감 무소식이고, 이따금 심통이 나서 감정 조절을 어려워하는 걸 보면, 이제는 종알종알 귀엽기만 했던 꼬마와는 작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사춘기 아이가 (부모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나면 지금까지 아이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부모의 생활을 비추는데, 그 순간 부모가 충족된 삶을 사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의 저자 이유리는 책 《부모로 산다는 것》의 한 구절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아이의 사춘기는 아이와 부모가 서로 정서적으로 독립하는 시기이며 이때 부모의 자리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인지, 아니면 먼지만 날리는 폐허의 땅인지 진정으로 돌아보게 되는 시기라고 말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전전긍긍하며 아이의 뒷모습만 붙들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내 마음에 친절을 베풀고 내 자리를 단단히 다질 수 있는 수 있는 시기로 삼을 것인가. 나는, 오늘이라는 시간에 내가 읽고 있는 이 모든 책들이 불안하거나 삶의 여러 모순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역시 그러하다.
“경로를 이탈했다는 자동차 내비게이션 안내음이 내 인생에 대한 경고처럼 들리던 순간, 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았다.” / 12p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는 그림을 보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굳건한 내면의 힘을 키우고자 했던 이유리 작가의 미술 에세이다. 그녀는 주변이 너무 소란스럽게 느껴지고 복잡한 세상이 버거울 때마다 정적이고 고요한 미술의 세계로 숨어 들었다. 그렇게 옛사람들이 남긴 작품 속에서 ‘이 모든 것은 다 지나갈 거야’라는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위대함’으로 박제된 작품 이면에 가려진 화가의 고독함과 고통, 시련을 들여다봄으로써,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만 보거나 경험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좌절이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해나갈 때 마침내 아름다움을 꿰뚫는 깊은 시선이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우리 인생에는 절절만이 있는 게 아님을, 화려한 순간과의 이별이 들이닥치는 때가 온다는 것. 하지만 우리는 떨어지는 불꽃처럼, 그것과 아름답게 멀어질 수 있다는 자각.
그 무엇보다 절정을 지나 사라져가는 빛도 불꽃이라는, 휘슬러가 가르쳐준 그 진실이 사무치게 아름다웠다. 마치 우리네 삶처럼 말이다. 청춘의 시절이 소란스레 지나간 후 아프고 적막한 퇴화의 시간이 닥쳐와도, 죽음을 맞기 전까지 우리네 삶은 그 역시 소중한 생명이듯이. / 42p
뭉크하면 누구나 <절규>를 대표작으로 손꼽지만, 나는 앞으로 <지옥에서의 자화상>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다. 화염이 뜨겁게 솟구치는 지옥 같은 곳에서 맨몸으로 꼿꼿이 선 채 화면 밖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까닭이다. 고작 다섯 살에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고, 이어 의지하던 누나마저 열다섯에 잃은 뭉크는 “나의 모든 작품은 질병에 대한 사색에서 비롯되었다. 두려움과 아픔이 없었다면 나의 삶은 방향키가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을 좀먹는 고통 속에서도 그림으로 하여금 슬프고 아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구체화하고, 이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감정을 객관화해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뭉크. <지옥에서의 자화상> 속의 눈빛이 증명하듯, 시련을 더 큰 의지와 맞바꿨던 뭉크에게서 ‘우여곡절 끝에 피는 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되새기게 된다.
그렇다. 우리의 본성은 악한 구석이 많다. 그리고 엔소르의 삶이 증명하듯 약하고 모순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안의 본능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단속해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위선이고 가면일지 몰라도, 말투를 다듬고 행동을 다듬은 세월이 쌓이면 그것이 결국에는 나의 인격이 될 것이기에. / 65p
아울러 코코슈카의 그림은 우리에게 사랑이 가져다주는 슬픔과 고통을 감내하고 수용하는 법을 알려준다. 제임스 엔소르의 그림에서는 약하고 모순적인 인간의 본성을, 휘슬러의 그림에서는 절정을 지나 사라져가는 빛도 불꽃이라는 진실을 배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앤디 워홀의 삶을 통해서는 자신의 취약성을 오히려 온몸으로 드러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왠지 할아버지도 ‘나’가 사탕을 살 만한 돈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이 그림은 1944년 9월 23일자 잡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표지를 장식해,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독자들이 이 그림을 특히 좋아한 이유는 아마도 그림 속 주인 할아버지의 표정에 떠오른 잔잔한 ‘체념’의 정서를 읽어냈기 때문이리라. ‘어쩔 수 없군. 또 하나의 동심을 지켜줘야지 뭐.’
(…) 어차피 때가 되면, 아이는 현실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기를 결정하는 이가 어른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조급해하거나 닦달하지 않을 것. 사탕 가게 할아버지들은 이 점을 잘 알았던 것 같다. / 187p
사랑과 계절의 공통점은 시작과 끝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왠지 이 사랑이 곧 끝날 것 같은 예감이 사로잡힌 코코슈카는 알마에게 애원한다. “제발 나를 사랑한다고 많이 편지해줘. 그림 앞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그 애원 끝에 그린 그림이 바로 <바람의 신부>이다. (…) 독일어로 ‘회오리바람’을 뜻하기도 하는 ‘바람의 신부’는 그림 속 남녀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고 있다. 사방에 미친 돌풍이 휘몰아치는데도 편안히 잠든 여자와 대조적으로, 남자는 혹여나 푸른 바람이 이 여자를 빼앗아갈까 봐 두 눈을 홉뜬 채 불안해한다. 이 두 사람은 바로 코코슈카 자신과 알마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 216p
미술에서 생의 부조리와 아름다움을 찾고, 일상을 환기시키는 여러 질문들에 다가갈 수 있어 특별한 에세이다. 미술 작품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이 작은 화폭에 삶의 수많은 투쟁을 담아내는 작가들에게 또 한번 경이를 느낀다. 그들의 생애와 비애가 생생히 담긴 그림 속에서 나의 이야기와 새롭게 써나갈 이야기들을 발견해보시길 바라며 이 책을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