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산가옥의 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4
조예은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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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폭력의 역사를 오래된 가옥과 죽은 자의 ‘하지 못한 말’에 새김한 조예은식 호러 문법은 이토록 탁월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외증조모의 죽음은 참으로 기이하다 할 수밖에 없겠다. 뇌출혈로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었던 외증조모는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일어설 수조차 없어 하루의 대부분을 침상에서 보냈다. 휠체어 없이는 본채로 나서기도 힘들었던 그녀가 어떻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그 새벽, 간병인도 없이 홀로 별채에 나갈 생각을 했을까. 마치 별채 저 밑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를 들으려 한 듯 바닥에 한쪽 귀를 바짝 댄 기이한 자세로 죽음을 맞으신 것 역시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별채. 떠올려보면 그곳은 이 집을 둘러싼 음습함과 불길함의 

진원지였다.’ / 9p



  조예은의 소설 『적산가옥의 유령』은 외증조모의 기묘한 죽음으로부터 10년이 흐른 뒤, 유산으로 적산가옥을 물려받은 운주가 별채를 둘러싼 옛 기억을 회상하는 데서 시작한다. 외증조모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별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면서, 별채 저 문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불길한 기운과 그에 대한 비밀을 끝끝내 밝히지 않은 채 돌아가셨다. 그래서 끔찍한 운명과 비극으로 향하는 입구처럼, 운주에게 있어 별채는 늘 불편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언젠가 운주는 외증조모에게 왜 이곳을 없애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외증조모는 이렇게 말했다. 별채의 주인은 따로 있다고, 안에 누군가 살고 있는데 건물을 부술 수는 없다고.




본채와 별채가, 수도관과 정원과 나무 기둥이 하나의 기관처럼 이어져 유기적으로 숨과 기억을 주고받는다. 그런 집은 자신의 벽에 깃든 모든 역사를 기억한다. 안에 살던 사람은 죽어도 집은 남는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그 집의 일부로 영원히 귀속된다. 먼저 무너뜨리지 않는 한 집은 누군가의 삶을 담으며 존재한다. / 10p







  가네모토 유타카. 운주가 그 망령을 본 건 외증조모의 유언대로 적산가옥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별채에서 들려오는 어떤 저항할 수 없는 소리와 힘에 이끌린 운주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망령의 퀭한 두 눈동자와 마주친다. 수 세대에 걸쳐 적산가옥에 머물러 있던 유타카의 망령을 본 뒤로, 운주는 자신이 미쳐가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믿을 만큼 쇠약해져간다. 그렇게 종종 꿈과 망상 속을 헤매던 운주는 점차 적산가옥과 별채를 둘러싼 처참하고도 끔찍한 비밀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망령이 손짓하는 바로 그곳에, 자신의 운명마저 위태롭게 서 있음을 깨닫는다.



그 연못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서 다시 그곳을 응시했다. 모습은 보다 선명해졌다. 열다섯 살이나 되었을 법한 어린애의 몸이었다. 작고 왜소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 순간, 불현듯 목덜미에 한기가 일었다. 달빛조차 없는 정원에서 나는 저 인영을 어떻게 알아본 걸까? / 68p


“그럴 일은 없어. 나도 아버지도 곧 줄을 거거든.”

소년이 내게 바짝 얼굴을 붙여 왔다. 손목을 붙잡고, 귓가에 짓궂은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나는 그때 그가 한 말을 얼마가 지나서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죽일 거야.” / 95p








   1930년대. 일본이 토지 약탈을 위한 조사사업을 끝내고 한창 산미증식계획을 펼쳤던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가문의 괴기한 수수께끼와 폭력과 광증의 역사를 적산가옥이라는 공간 안에 정교하게 축조해낸 수작이다. 마치 비명을 지르듯 곳곳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낡은 일본식 가옥과 콘크리트 구조물로 된 별채가 주는 이질감, 여기에 피처럼 붉은 벨벳 소파와 꾸불꾸불한 내장을 훤히 드러내고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채 죽은 잉어 한 마리 같은 이미지들이 시종 음산하고 기분 나쁜 기운을 뿜어내며 독자의 신경을 자극한다. 한편 ‘집은 자신의 벽에 깃든 모든 역사를 기억한다’는 외증조모의 일기글처럼, 처절한 폭력의 역사를 오래된 가옥과 죽은 자의 ‘하지 못한 말’에 새김한 조예은식 호러 문법은 결국 코끝을 아릿하게 만든다.



  역사와 미스터리, 초자연적인 현상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조예은표 호러에 푹 빠져 읽었다. 장르적 재미와 문학적 완성도까지 잘 쌓아올린 작품으로 이 여름에 가장 탁월한 소설을 찾으시는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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