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2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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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욕망 그리고 억압의 설계도를 피라미드에 정교하게 축조해낸 작품!

이스마엘 카다레라는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어 반갑다!





  이스마엘 카다레의 소설 『피라미드』는 기원전 2600년경, 새 파라오 쿠푸가 자신의 피라미드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왕궁의 점성가와 최측근 대신들은 마치 재앙의 소식이라도 들은 양 낯빛이 어두워진다. ‘이것이 그대들에게 그토록 상심할 만한 일이란 말인가? 마치 내 피라미드가 아닌 그대들 자신의 피라미드를 두고 괴로워하는 것 같군!’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굳어 있는 쿠푸에게 대제사장은, 역설적이게도 피라미드가 파라오의 힘이 약했던 위기의 시대에 구상된 것이라 주장한다.



  너무나 풍요로웠기에, 너무도 안락했기에 파라오의 권위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들을 억압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던 과거의 파라오들은(어쩌면 그 측근들까지) 가장 눈에 띄면서 상징적인 건축물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잊을 만큼 밤낮으로 몰두할 수 있는 것, 언젠가는 마무리되는 동시에 절대로 끝나지 않는 무엇이자 영원히 되풀이될 수 있는 것. 그렇게 군중을 지배하고 정신을 우매화하고 의지를 꺾어놓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 바로 피라미드였다.



정상에 다다르기 위한 끝없는 욕망과 우울



  “피라미드를 만들겠노라. 가장 높은 피라미드. 더없이 웅대한 피라미드를.”

  결국 더없이 웅대한 피라미드를 짓겠다던 쿠푸의 선언은 이집트 전역에 불길한 피의 바람을 몰고 온다. 그 옛날, 피라미드를 처음 만들던 시기부터 누구나 알고 있는 기정사실이 있었으니 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절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거친 노역과 학대, 처형에 대한 공포, 돌 한 단 그리고 또 한 단이 쌓여갈 때마다 솟아오르는 중압감, 여기에 온갖 음모와 모독까지. “결국 우린 물구나무선 채 일하고 있는 거야.” 누구든,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건축물을 짓겠다는 집요한 열망이 오히려 모두의 삶을 거꾸로 매달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우두머리 석수 한쿠의 대사야말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설명한다.



“무엇보다 피라미드는 권력입니다. 폐하. 억압이요, 힘이요, 부이지요. 동시에 군중을 지배하고 그 정신을 우매화하고 의지를 꺾어놓는 무엇이며, 단조로움이요 소모입니다. 그러니까 지존이시여, 그건 폐하의 가장 든든한 보초입니다. 폐하의 비밀경찰이지요. 폐하의 군대고, 함대이고, 하렘입니다. 그 높이가 더해갈수록 그 그늘에 자리한 폐하의 백성은 미미한 존재로 보일 겁니다. 그 백성이 작아질수록 폐하의 위풍당당한 자태가 더욱 돋보일 테이죠.” / 17p

 


“아, 어머니, 무덤 하나를 만들다 제 삶을 마감해야 하다니요!” 같은 한탄(길게 늘어지는 그 어조는 듣는 이로 하여금 뭔지 모를 복잡한 감정에 빠지게 했다)이 새어나오게 되다니,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 “피라미드가 완성되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누군가 궁금해서 이런 질문을 던지면 상대가 받아쳤다. “이 딱한 친구야, 그다음 일이 자네와 무슨 상관인가? 그때 자넨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을 텐데!” / 53p

 


아침에 그 매끄럽고 완벽한 모서리와 면들이 차디찬 침묵 속에 빛을 발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노라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저토록 숭고한 형체가 정말로 사람들을 주야로 짓이겨대는 그것이란 말인가? 어둠이 내리면 그 몸통이 조각조각 해체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중심축에서 떨어져나온 단과 버팀돌, 그밖의 모든 돌들이 피와 진흙 범벅이 되어 엄청난 굉음과 혼란을 야기하며 달려들고, 사방에 죽음의 슬픔을 퍼뜨릴 터였다. / 105p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 정작 쿠푸 역시 피라미드에 대해 양면적 감정을 느끼는 대목이었다. 그는 그것에 왠지 모를 끌림과 동시에 증오심을 느끼곤 했는데, 스스로 자기 소멸을 준비하는 것에 대한 혼란스러움 탓이었다. 그 배경에, 역사가들과 시인들이 완성했다던 아버지 스네프루의 사후 전기 속의 글귀가 분명 그를 자극했을 것이다. ‘스네프루의 낮. 그 낮이 가고 스네프루의 밤. 다시 스네프루의 낮. 그다음엔 다시 밤. 이어서 낮. 낮이 가고 스네프루의 밤.’ 모두의 삶을 갈아 넣어 쌓은 이 어마어마한 건축물 속에 고작 낮과 밤으로 끊임없이 재현되고 마는 얄팍한 죽음이라니….



  이처럼 『피라미드』는 전체정치의 잔혹함과 힘없는 자들의 무력함, 그 모든 것 앞에서 공허해지는 죽음의 허상과 실체를 ‘피라미드’로 상징화한 아주 특별한 작품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플롯이나 독자를 흥분케 할 만한 갈등 요소는 없지만, 권력과 욕망 그리고 억압의 설계도를 이 불가사의한 건축에 정교하게 축조해낸 작가의 남다른 필력이 돋보인다. 전체주의 체제의 악랄한 전략과 광기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우화적이고 위트 있는 표현으로 시종 기묘한 공포를 자아내는 점도 흥미롭다.




마법사는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그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그런 다음 깊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라미드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폐하. 피라미드는 기다립니다.”

파라오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다.” 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니야, 기다리지 않아!” / 123p






  이스마일 카다레는 알바니아 출신으로, 우리에겐 꽤나 낯선 작가다. 그래서 이 작가가 내게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선물해줄지 기대되는 마음으로 작품을 읽었고, 이 특별한 작가의 발견은 또 나를 흥분케 했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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