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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소설 ㅣ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정지아 외 지음, 이제창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12월
평점 :

그 어떤 사람도 방황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나만 아프고 나만 힘들다고 느껴질 때, 우리 마음에 꼭 필요한 일곱 편의 소설들!
비평가 박혜진은 ‘평상심을 잃고 실제적이지 않은 것을 지각하는 등 발열과 현기증은 심리적 재난 상황에 울리는 맨 처음 사이렌’이라 했다. 뜨거운 열감에 온몸을 떨다 마침내 균형을 잃고 정상 궤도에서 분리되어 멀어져가는 듯한 이탈감. 어쩌면 ‘방황’은 그러한 발열과 현기증의 징후를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과정이 아닐까. 그러나 이 모든 병증을 앓고 나서야 명료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거기,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창비교육의 테마 소설 시리즈 『방황하는 소설』은 정지아, 박상영, 정소현, 김금희, 김지연, 박민정, 최은영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작가들이 쓴 소설 중 ‘방황’을 주제로 한 단편 소설을 수록해 엮은 책이다. 불완전한 삶 속에서 오늘도 저마다의 좌표를 찾아 방황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군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또 누군가는 개인의 가치관과 사회적 합일 사이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존재를 송두리째 잊어버리고 자신을 증명할 길이 없어 고민한다. 이렇게 일곱 편의 작품을 찬찬히 읽다 보면 우리는 어떤 사람도 방황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는 깨달음에 다다르게 된다.
나는 기억을 잃었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기억 상실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결론과 동시에 피식, 헛웃음이 새 나왔다. 기억 상실이라니. 아침 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의 가장 식상한 소재가 그의 현실이 된 것이다. / 정지아 <존재의 증명> 중에서 14p
여기,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가 있다. 정지아의 소설 <존재의 증명>에서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 나이, 직업 등에 관한 기억을 잃어버린 ‘나’가 등장한다. 주머니를 뒤져보지만 지폐를 제외하고 지갑은 텅 비어 있고, 휴대폰에는 저장된 전화번호 하나 조차 없다. 심지어 찾아간 파출소에서는 지문 조회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그의 기억은 그 자신에 대한 정보만 싸그리 지워진 것 같았다’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 취향이나 좋아하는 의자 브랜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어찌된 일인지 머릿속에 선명하다. 파출소와 아파트 관리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찾은 집에서 그가 좋아하는 이토고 소파에 몸을 던지며 그는 생각한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도 상관없었다. 이 집의 공간을 채운 것들이 곧 그였다.’
소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름과 나이, 내가 살고 있는 집 주소 따위가 아니라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들이 아닐까.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방황이라면, 얼마든지 방황을 낙관하여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허탈했다. 동시에 그는 안도했다. 신분을 찾지 못한 것은 허탈했지만, 지갑 안이 각종 영수증이나 명함 따위로 너저분하지 않은 것에 안도한 것이다. 앉아 있는 공간이나 소지품의 상태나 그는 자신의 취향이 썩 마음에 들었다. 기억을 찾지 못하는 것은 물론 두려웠다. 그러나 사라진 기억 속의 자신이 허접쓰레기 같은 취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을 넘어선 공포였다. / 정지아 <존재의 증명> 중에서 21p
총 네 개의 트위터 계정이 비슷했다. 각 트위터마다 음식, 의자, 조명, 여행에 관한 남의 글과 사진들이 가득 차 있었다. 기억을 잃은 그가 떠올렸던 커피와 의자에 관한 정보의 출처가 트위터였던 것이다. 자신의 신분을 여전히 모르는 채였지만 자신의 전부를 알게된 느낌이었다. / 정지아 <존재의 증명> 중에서 23p



방황의 모습과 시기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이유로 또 같이 느낀다는 점에서 조금은 견딜 만한 것이 되기도 한다. 비극적인 폭발 사고로 건물이 무너진 사고로부터 겨우 살아난 지수는 함께 살아남은 지훈의 솔직한 고백과 기이한 죽음을 거친 후에야 마침내 무너진 건물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영혼을 건져 올릴 준비를 하게 된다(정소현, <엔터 샌드맨>. 주위 사람들이 모두 떠나보내고 일종의 도피처로 삼은 중국에서 옥주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예후이 덕분에 과거와 애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다른 사람으로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상실의 무게는 견딜만해진다는 것도(김금희, <월계동 옥주>).
그렇게 ‘가족’ 같은 회사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기획 회의에 들어갈 때도, 남이 쓴 기사를 필사하다시피 베끼거나 내 기사가 틀린 맞춤법으로 고쳐질 때에도 나는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황은채 역시 나와 마찬가지인 듯했고, 이런 우리의 변화가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이라 믿었다. 그렇게 나다운 것들을 깨끗이 표백하고 나면 비로소 매거진C의 색깔이 입혀져 그토록 염원하던 정직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 박상영 <요즘 애들> 중에서 69p
그것들은 지수에게 그런 고통이 실재했고, 이 세계가 명백한 현실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매번 현재화되어 생생하게 살아 올라오는 부정적인 감정과 감각들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이 삶을 긍정하도록 만들었다. 생활의 변화 역시 이 삶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증명해 주었다. / 정소현 <엔터 샌드맨> 중에서 114p
그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 소리가 아이답지 않게 아무것도 조르지 않고 바라지 않는다고 그녀가 자랑하자 그는 말문을 잃었다. 그러더니 소리에게 물었다. 소리는 뭘 먹고 싶어? 소리는 뭘 하고 싶어? 아무거나 괜찮아. 소리가 대답하면 아니, 소리가 진짜 먹고 싶은 거, 라며 소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무거나는 답이 아니야, 소리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 최은영 <파종> 중에서 236p


최은영의 소설 <파종>에서 ‘소리’는 자신의 다리에 난 흉터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한다. “근데 난 이게……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 삶에 완전무결한 것은 없다. 살아가는 내내 우리는 몸과 마음에 여러 상흔을 남기게 되겠지만, 그 시간을 통과해온 우리 스스로에게 믿음을 가지는 한 상흔은 더 이상 고통으로만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일곱 편의 소설들이 보여준 그 미더운 마음들이 오늘도 삶의 방향을 찾아 방황하는 이들에게 밝은 등불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