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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평점 :

‘디아스포라 문학’의 새로운 지대!
결핍과 욕망, 정체성에 관한 강렬하고도 놀랍도록 여운이 가득한 소설!
어떤 경험들은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기도 한다. 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은 한국계 미국인인 20대 청년 틸러가 ‘타국에서 보낸 일 년’이라는 의문의 시간으로부터 달아나, 30대 여성 밸과 그의 아들 빅터 주니어와 함께 사는 시점에서부터 전개된다. 고작해야 대학생에 불과한 그가 어쩌다 한참 연상인 데다 남편 때문에 사회적으로 고립된 여인과, 심지어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지닌 그녀의 아이와 함께 살기를 자처하게 된 것일까. 그것도 던바에 살고 있는 그의 아버지에게는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로. 확실한 것은 ‘비참한 여행’이었음이 분명한, ‘타국에서 보낸 그 시간 때문에’ 그가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최대한 세게 나를 꽉 안아.
필요하다면 날 뭉개 버려도 좋아.
이야기는 밸과 빅터 주니어와 함께 새 가정을 꾸린 틸러의 현재와 타국을 여행했던 과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한국계 혼혈인인 틸러는 대기업 관리직인 아버지 덕분에 미국의 부유한 도시 던바에서 대학을 다니며 그럭저럭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마음 한편에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가출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에 대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틸러 앞에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어서 이들 부자관계는 늘 피상적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틸러는 그 어디에도 애착이나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은 그저 정해진 궤도를 따라 도는 평범하고도 애매한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골프 캐디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중국계 미국인 사업가이자 화학자인 퐁 로우를 만나게 된다. 틸러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퐁은 마침 틸러가 특별한 미각을 지녔음을 감지하고 자신의 사업체를 따라 돌며 새로 구상 중인 사업에 대한 도움을 줄 것을 제안한다. 틸러는 단번에 퐁에게 깊은 호감을 느낀다.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미묘한 유대감뿐만 아니라 틸러가 간직하고 있는 어떤 절박한 허기를 발견해내는 퐁의 남다른 시선에 이끌리고 만다. 그렇게 멘토이자 대안적 아버지 같은 존재로 퐁을 따르게 된 틸러는 퐁의 해외 투자 여행에 거침없이 통행한다. 지루한 현실로부터 달아나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고, 세상의 작은 일부가 언젠가는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낙관은 이 뿌리 없는 청년으로 하여금 낯선 타국으로 떠나는 데 있어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었다.
흔히 사람들은 순간을 살라고 조언한다. 끊임없이 미래나 과거를 보려 들지 말고, 그 모든 걸 더해 보지도 말고, 현재라는 풍성하게 무르익은 과일을 맛보라고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면 인간은 그 순간에 머물게 된다. 중독자처럼 자신을 속이고 포기해 버린다. 그 모든 달콤함이 썩는 것 외에는 아무 변화도 일으킬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 29p
“뭐, 접시 닦는 일이죠.”
“아주 중요한 일이야. 나도 이 나라에 처음 왔을 때 그 일을 한 적이 있어.”
“지금은 안 하시잖아요.”
“지금은 다른 일을 하지. 전부 아주 필요한 일이야. 성취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해.” / 64p
나는 다양한 순간의 엄마 모습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 순간들은 꾸준히 서로 녹아 들어간 끝에 전체가 곤죽으로 변해 버렸다. 엄마는 여러 여성적 형태가 유령화된 채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어떤 여자가 됐다. 자기 영속적인 주기에 따라 깜빡이면서 초점이 맞았다가 흐려지고, 맞았다가 흐려지는, 최종적이고 조정이 어긋난 상이 됐다.
나는 우리가 각자의 연옥을 짓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게 내 연옥일 게 틀림없다. / 105p



우연히 만난 타인에게 이끌려 안정적이었던 삶을 등지고 낯선 세계로 훌쩍 떠나버리는 틸러의 모습은 여기가 아닌 어딘가, 혹은 누군가로부터 아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고 싶은 이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나는 사라지고 싶었다. 삶으로부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삶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는 틸러의 고백은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을, 피상적으로 흘러가는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하와이, 중국 등을 1년간 떠돌며 틸러가 겪은 일들은 예상처럼 그리 썩 유쾌하지는 않다. 이 여행이 제 의지와는 관계없이, 퐁의 준비된 부속물이 되어, 문자 그대로 그가 가리키는 곳이면 어디로든 함께 굴러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공허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게 감정적, 육체적 노예로 지냈던 타국에서의 일 년을 뒤로하고, 끝끝내 불완전하지만 자신만의 가정을 이루어 밸과 빅터 주니어의 결핍까지 함께 끌어안으려는 틸러의 모습은 ‘결핍을 메우고 채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려는 삶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처음으로 나는 밸이 끝없이 끌어모아야 했던 에너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과거가 무너져 내렸기에, 현재가 계속 이어지도록 만들기 위해 온갖 에너지를 끌어모아야 했다. 나는 밸에게 몸을 기대고 웅크리며 그녀가 나를 안도록 했다. 최대한 세게 나를 꽉 안으라고 말했다. 필요하다면 날 뭉개 버려도 좋아. 밸의 힘은 놀라웠다. 그녀에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단순히 에너지 고갈의 연료라는 걸 깨달은 게 그때였다. / 128p
“럭키는 내가 상당히 부유하고 괜찮은 자격을 갖춘 전문가라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일을 뭐든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 녀석은 화려한 코즈모폴리턴의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나 같은 갈색 인종은 빈틈없이 경계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현실을 잘 모르거든. 현대 문명 속에서 나 같은 사람은 언제나 대비해야 하고 집중해야 해. 우리에게는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위태로운 일이야. 우리는 어느 순간에든 어느 지위에서든 뽑혀 나갈 수 있어. 즉시 내팽겨쳐질 수 있지.” / 177p
퐁은 반쯤 씩 웃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하지만 틸러, 분명히 말하는데 내 성공은 다른 모든 성공이 그렇듯 우연이야. 내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거나 사업에 대해서 고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야. 당연히 그렇게 했지. 난 가족들이 있어서 행복해. 여느 이민자가 그렇듯이 우리가 가진 것이 자랑스러워. 우리가 일군 바쁜 삶이 말이야. 하지만 이건 병에 담긴 사탕처럼 수많은 결과 중 하나야. 넌 아직 모를 수 있겠지만 세상은 너무도 쉽게, 너무도 수월하게 어느 순간에는 네게 다른 사탕을 줄 수 있어.” / 468p
“사람은 사소한 딴생각으로 고개를 돌리게 돼 있어. 상황의 어마어마한 규모에도 작은 아픔에 집중하게 되지. 우리는 모두 그런 식으로 갇혀 있는 거야.” / 621p



『타국에서의 일 년』은 틸러라는 청년의 성장 서사에 가깝지만, 개인과 가족 그 너머에 존재하는 아시아계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역사가 무릎 꿇린 개개인의 삶, 고립에서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에의 분투 등을 통해 놀랍고도 풍성한 이야기 무대를 선사한다. 한 층 한 층 누적된 이야기의 힘이란 이런 것이라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장대한 서사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저절로 깊은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이따금 독자의 정서를 배반하는 듯한 대담한 전개 속에서도 이야기를 제어하는 능수능란한 작가의 필력 역시 단연 돋보인다.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 역사와 시대의 사유자로서 결핍과 고독에 대한 깊은 통찰은 진한 공감과 긴 여운을 남긴다. ‘디아스포라 문학’의 새로운 지대를 발견했다는 점에서도 꽤 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듯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