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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평점 :

‘약자’라서 착취당했고, 힘을 가지면 ‘마녀’라 낙인찍히거나 그 배후를 의심받았던 여성들!
자신들의 역사가 축소되고, 폄하되어 왜곡되는 동안에도 낙관하려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
‘세 명의 부인 용의자, 한 명의 미남자 학구파 교수를 죽이다!!!’
때는 1948년 5월, 조선이 해방한 후 첫 선거가 있던 해다. 종로경찰서의 검안의이자, ‘세 개의 달’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여성 탐정으로 활동하던 연가성은 경찰서로 들어가기 직전에 받은 호외지를 심란한 마음으로 훑는다. 때마침 미군정 조사관 이든이 종로경찰서를 방문하고, 그는 호외지 속의 죽은 교수를 죽인 진범이 미군임을 미리 밝힌다. 다만 살해범이 미군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미군정과 남조선의 관계와 여론이 악화될 것을 우려해, 세간에 떠도는 세 명의 용의자, 즉 사건 당일 윤박 교수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세 명의 여성을 대신 용의선상에 올려 사건을 조작하려 한다. 이대로라면 무고한 여인이 희생될지도 모른다, 연가성는 친구인 문화부 기자인 권운서와 함께 사건의 전말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불온한 여성 서사로부터 서로를 구원하기 위해 손을 내미는 여성들
소설 『마고』는 극 초반부터 눈길을 끄는 포인트가 상당히 많은 작품이다. 이동기의 표지화 ‘모던 보이’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48년은 기존의 조선과 일제의 잔재, 그리고 새롭게 들여온 미국의 문화와 정치가 이질적으로 한 데 뒤섞인 미군정기(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미군이 3년간 실시한 군사통치시기) 시절이었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저마다 상이한 의지와 인식이 충돌하여 벌어진 괴리들로 인해 극도의 혼란이 야기되던 때였다. 이 무렵 미군정은 여성들의 권리를 적극 지지한다며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지만, 여성의 인권이 적극적으로 개선될 여지는 없어보였다. 여전히 여성들은 ‘약자’라서 착취당했고, 힘을 가지면 ‘마녀’라 낙인찍히거나 그 배후를 의심받았다.



작가 한정현은 이러한 시대적 특수성 안에서 흥미로운 배경을 지닌 여성들을 대거 등장시킨다. 여성 검안의이자 탐정인 연가성, 조직 범죄에 이용하기 위해 비구니로 키워졌다 기생집에 팔려간 카페 주인 송화, 남자의 몸을 지녔으나 여자로 살며 가성을 사랑한 권운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호해서 일명 ‘마녀’라 불리는 호텔 포엠 사장 에리카와 같은 이색적인 인물들을 포진한다. 친미 인사였던 어느 교수의 죽음으로 인해 억울하게 용의자로 내몰린 세 명의 여성을 추적하는 장르적 속성의 저 너머로, 혼란의 시대-불온한 여성 서사로부터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힘이 과연 압권인 작품이다. 다만, 미군정기 속 조선 여성들의 삶을 재건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와 의욕을 짧은 호흡 속에 모두 담아내기에는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은 있다. 개개인의 서사를 압축하기에는 하나하나의 캐릭터성이 강해서 조금은 느린 호흡의 글로 충분히 녹여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미군이 들어오고 경무국장이 치안 계획 포고문을 발표한 후 기관들은 모두 국가 재건과 좌익 사범 처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게다가 1945년, 조선 주둔 사령관 하지는 조선의 출판 자유를 보장한다고 했으나, 막상 조금이라도 미군정과 생각이 다른 신문은 좌익으로 몰려 폐간되기 일쑤였다. / 19p
‘에리카라면, 이곳 서울 여인들의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이어요. 사내들은 마녀라고 부르지만 마고라고 한다네요. 그러고 보니 어쩌다 마고할멈이 마귀할멈이 되었나 몰라요.’ / 68p
“아, 아니에요. 저는 연가성 씨의 그런 점이 멋집니다. 여성들이 저에게 잘 보이려 화장하고 그러는 것이 별로여서요. 특히 일본 여성이나 조선 여성들은 과하게 순응적이죠.”
이든은 미소를 지었지만 운서와 가성의 표정은 동시에 어두워졌다. 순응하지 않으면 죽이잖아요. / 85p
하지만 공창제에 걸려들 만하게 몸을 파는 사람들은 뒤를 봐줄 정치인이 없는 하루벌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사실 돈 벌 방안이 없어 그 일을 했던 거다. 아마 윤선자도 식모 일을 갑자기 그만두게 되면서 막막했을 것이다. 제국 시기 내내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에 비해 열악한 환경에다 임금도 두세 배 낮았다. 오죽했으면 강주룡이 기와 위에 올라가 여성 노동자의 권리 시위를 했을까. / 93p



마고(麻姑). 창세신이자 대지모신으로 대한민국 토속신앙에서 유일한 여성 신인 마고는, 다른 남성 신들이 산을 넘어뜨리고 육지를 파괴해서 세상을 창조할 때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세계를 만들었다 한다. 그러나 조선과 일제를 거치면서 마고는 마귀가 되었다. 자신이 만든 바다에 빠져 죽고 자신이 정성 들인 세계의 사람들을 해치는 마귀할멈으로 전락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 운서는 가성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냥 이제 여성 신은 필요 없는 거야. 남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여성이 만들었다고 하면 말이 안 되니까.” 자신들의 역사가 축소되고, 폄하되어 왜곡되는 동안에도 낙관하려 했던 여성들, 그들의 이야기는 늘 나를 먹먹하게 한다. 기억하는 한 낙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역사를 쓰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작가 한정현의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이게 바로 낙관이야. 우리는 낙관할 수 있어. 우리가 잊지 않고 있으니까.” / 183p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