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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는 언니들 - 12명의 퀴어가 소개하는 제법 번듯한 미래, 김보미 인터뷰집
김보미 지음 / 디플롯 / 2023년 9월
평점 :

‘다채로운 삶’의 가능성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태도에 관하여!
당신이 누구든, 성 정체성이 무엇이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5년, 스물세 살의 대학생 김보미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 나가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후보가 레즈비언이라 하니 언론은 앞다투어 취재를 했고, 세상은 이 일로 화들짝 놀란 듯했다. 김보미는 커밍아웃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가진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긍정하고 사랑하며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로부터 8년 뒤, 그는 퀴어들의 인터뷰집인 『키스하는 언니들』을 출간하며 서두에서 이렇게 밝힌다. 찬찬히 돌이켜보면 퀴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불행하거나 어둡지는 않았다고. 그러면서 퀴어로서 누릴 수 있는 다른 즐거움도 있다는 희망과 함께 지금, 오늘의 행복을 놓치지 말자고 다짐한다. 여기, 열두 명의 여성 성소수자들 역시 성별과 정체성으로 가능성을 규정짓는 사회적 잣대를 깨부수고 기꺼이 자신이 되기로 선언한 이들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행복의 가능성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는 사실 우리 사회의 변화를 기원하는 여러 목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책은 그저 퀴어들을 위한, 퀴어 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성 정체성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기 위한 인권이며,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을 알고 있거나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 나아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되어 줄 것이다.
퀴어는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성소수자이지만 이상한 괴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한 존재도 아니고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어요. / 18p
유튜버부터 변호사, 인권활동가, 스타트업 CEO, 공무원, 사회운동가, 레즈비언 전용 바 대표에 이르기까지, 책은 나이와 세대를 불문한 퀴어들이 존엄하게 사랑하며 욕망하는 퀴어식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의 성 정체성은 무엇일까? 나의 성 정체성을 주변 사람들에게 커밍아웃해야 할까? 정체성이 커리어 형성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어디에서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사회가 원하는 정상성이라는 잣대에 따르면 퀴어라는 정체성에는 수많은 차별과 한계, 법적 제도도 노후도 보장되지 않는 불안과 고통이 따른다. 책 속 열두 명의 인터뷰이들 역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누구나 겪는 어려움이니 스스로를 탓하지 말라”고 다독이고, “혼자 있지 마세요.”라며 손을 맞잡음으로써 불안을 담담히 마주할 용기와 지혜를 얻어나갔다. 그리하여 사회가 그어 놓은 정상성이라는 범주에 자신을 욱여넣지 않아도 멋지고 제법 번듯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체성을 이야기하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복잡다단한 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의 정체성이 공동체에서 쉬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우리라는 우려가 입을 막는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단순히 남들과 다른 정도를 떠나 ‘정상적’으로 보지 않는 혐오의 시선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상황이 녹록치 않고 심리적으로도 두려울 뿐 아니라 물리적 위협까지 느껴진다면 조심스러운 마음에 선뜻 자신에 대해 입을 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저 감정적인 반응을 넘어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는 등 실질적인 차별이 일상에서도 이어질지 모른다는 걱정도 들고요. / 21p
제도 범위 밖에 있다는 불안과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무력감은 성소수자라면 누구나 깊게 공감할 감정입니다. 자잘한 좌절 앞에서도 다시 나답게 사랑하는 삶을 이어나가는 힘은 지칠 때 언제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이들에게서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29p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진심 어린 애정은 정신 건강과 자존감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세상에 나에게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피를 나눈 원가족하고도 늘 ‘성격 차이’로 다투는 우리들이니까요.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라며 이해의 폭을 넓힌다면 함께 장기적으로 관계를 지속할 가능성이 커질 것입니다. / 91p



스스로 성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타인, 특히 부모와 가족에게 밝히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책 속의 인터뷰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가족과 소원해졌고, 심지어 막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30대 직장인인 춘식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삶에서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인 자신의 정체성, 연애 등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소거하고 대화하려다 보니 부모와도 관계가 점점 소원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나눈 대화에서 어머니가 실은 이미 일찍부터 눈치를 챘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지금까지 어머니는 남몰래 춘식 씨를 이해하고 인정하기 위해 공부하고 또 노력해왔던 것이었다. 물론 춘식 씨가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어머니에게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춘식이라는 사람 그 자체를 인정하기로 하며 그 곁에 서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던 어머니의 커다란 마음이 지금의 춘식 씨를 더욱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주변 친구들은 벌써 다 취직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혼자만 길을 못 찾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으며,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으로부터 압박도 받았죠. 모종의 열등감이 섞인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은 졸업-취직-결혼-출산 등 주어진 과업을 순서대로 해내는데 (요즘은 이조차 쉽지 않아 보입니다만) 내 인생은 왠지 처음부터 꼬여버린 것만 같을 때였습니다. 암흑 속에서 세상과 싸우며 한 발씩 간신히 나아가야 할 것만 같고 나만 뒤처지고 멈춰버린 것 같아 두려웠죠. / 126p
춘식 님은 더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꼭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신이 누구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을 몸소 느꼈고,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 혼자서도 잘 지내는 방법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애인을 만나면서 오히려 자신과 정체성을 긍정하고, 진정한 의미의 ‘홀로서기’를 하고 있습니다. / 131p


책을 읽던 도중 인터뷰이 중 한 사람인 김규진 씨가 출산을 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국내 최초로 동성 부부의 임신 사실을 알렸던 김규진 씨가 자신의 SNS에 '오출완'(오늘 출산 완료)이라는 글과 함께 병원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사진을 올리며 딸 '라니'의 출산 소식을 알린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댓글에는 부정적인, 아니 온통 불편한 언어들로 가득한 글들이 도배되어 있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나 역시 편견이 없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중요한 메시지를 되새겨본다. 우리 각자는 모두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성별과 정체성으로 한 사람의 가능성을 규정짓고, 정상적이지 않다고 배제하고, 미워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나의 불완전한 요소를 인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이 자신의 성 정체성, 성별 이분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채로운 삶’의 가능성들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다행히 주변에 참고서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중에 당신에게 필요한 실질적인 조언이 담겨 있길 바랍니다. 영상 속 주인공들의 삶에서 보았던 보석 같은 순간들이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도 숨어 있습니다. 영상 속 이야기들은 어쨌거나 해피엔딩입니다. 우리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매 순간 힘을 내요. / 235p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