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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미스터리 2023.가을호 - 79호
고나무 외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9월
평점 :

추리하는 쾌감을 넘어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하는 강렬한 울림까지!
심리, 트릭, 유머, 역사 등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다양한 참맛을 느끼는 시간!
코난 도일은 《스트랜드 매거진》에서 셜록 홈스가 활약하는 단편들을 싣기 시작하면서 전무후무한 탐정 캐릭터로 불멸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하드보일드의 거장 레이먼드 챈들러 역시 《블랙 마스크》라는 잡지에서 <협박자들은 쏘지 않는다>라는 작품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인 에도가와 란포도 《신청년》에서 단편으로 데뷔했고, 국민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의 아버지 요코미조 세이시(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추리작가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다양한 매체가 발달하면서 출판물을 비롯해 잡지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나, 참신한 신인 작가들을 발굴하고 양질의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이기 위한 창구 역할을 지속적으로 해 온 잡지는 여전히 유의미하다. 《계간 미스터리》의 편집장은 “작가는 풍성한 실험을 통해 창의적인 단편을 창작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발표할 수 있는 다양한 잡지가 공존하는 것, 장르-단편-잡지가 쉽게 끊어지지 않는 삼겹줄을 이루는 것, 그것이 미스터리 장르, 아니 그 나라의 문화가 융성하는 최소한의 기반”라 표현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유일의 미스터리 전문 계간지인 《계간 미스터리》를 통해 다양한 작가와 한국형 미스터리를 꾸준히 만날 수 있는 점은 매우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미스터리 단편작부터 이야기 논픽션을 이해하는 기획 특집에 이르기까지
이번 가을호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미스터리 장르를 탄탄하게 구축한 작품들이 눈에 띤다. 신인상을 수상한 무경의 소설 <치지미포, 꿩을 잡지 못하고>는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당시, 빨치산을 토벌하는 부대원으로 잠입했던 자칭 ‘악마’의 회고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켜 지옥으로 보내야했던 했던 악마는 전쟁터를 누비며 교묘하게 자신의 씨앗을 흩뿌린다. 선도 악도 없는 혼돈의 시대에, 그야말로 악마의 속삭임에 홀리지 않고서야 배신하고 음모를 꾸미며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맹목적인 이기를 이해할 길이 없었던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며느리에게 뭐라고 말을 걸며 치근덕거리는 윤 소위를 보며 박 상사가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저 무식한 윤 소위가 서울대학교 출신의 소위 ‘엘리트’라는 게 참 희한하기만 했거든요. 오히려 내 옆에 있는 소학교나 겨우 나온 박 상사가 훨씬 침착하고 지적으로 보였지요. 이 표면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 기이한 어긋남이야말로 인간의 재미있는 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무경, <치지미포, 꿩을 잡지 못하고> 중에서 33p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또 하나의 소설 <해녀의 아들>(박소해)은 지난 여름호 <불꽃놀이>에서 활약했던 좌승주 형사를 다시 한 번 불러낸다. 해녀인 어머니에게서 나고 자란 좌승주는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본가를 찾았다가, 친이모처럼 자신을 아껴주었던 영순이 물질을 하던 중에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는다. 좌승주는 단순 사고사로 보였던 이 죽음의 배후에 제주도민 9분의 1이 희생된, 제주 4·3 사건이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당시 사건으로부터 살아남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러했듯, 좌승주는 자신의 유전자에도 그날의 잔혹한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음을 발견하고 신음한다. 이렇듯 영순의 죽음에 얽힌 진실에 다가가면 갈수록 독자들은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불온한 역사의 참혹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가 얽히고설킨 혼돈의 도가니. 4·3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던 소설 속 글귀가 내내 여운을 남기며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치밀한 조사와 디테일 넘치는 묘사로 정교한 역사 미스터리를 완성해낸 작가의 필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과거의 잘못으로 현재의 살인이 일어났다면? 긴 세월을 사이에 두고 과거의 어떤 행동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현재의 살인에 영향을 미쳤다면? / 박소해, <해녀의 아들> 중에서 160p
무대는 이미 갖춰졌다. 당신은 즐기기만 하면 된다. 홍정기의 <팔각관의 비밀>은 잘 차려진 밥상처럼 추리를 하는 미스터리 본연의 재미를 충분히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김창현의 <멸망 직전>은 지구를 덮치는 미확인 행성보다, 멸망 직전에 이르러서도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이기가 진저리 날만큼 더 무섭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과장된 만화적 연출이 극적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김세화의 <알리바바와 사라진 인형>, 은둔형 외톨이를 소재로 주인공의 불안 증세가 어디까지 가 닿을지 예측할 수 없어 기묘한 공포를 낳는 여실지의 <꽃은 알고 있다>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 호에 이어 연재된 백휴의 <탐정 박문수-성균관 살인사건?>는 박문수의 활약이 무색할 정도로 ‘범인이 이렇게 시시하게 밝혀지는 건가’ 아쉬워지려는 찰나, 뒤통수를 단단히 후려치며 다음 호를 기대하게 만드니 겨울 호가 벌써 기다려진다.



단편 소설 외에도 <그것이 알고 싶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처럼 우리가 범죄 실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살펴본 기획 특집과 미스터리 영상 리뷰, 독자가 직접 트릭을 재구성해 범인을 찾아보는 <추리소설가의 딸 납치사건>도 《계간 미스터리》를 즐기는 묘미다. 그나저나 김나훔의 표지 그림이 단연 압권이다(두 아들이 신기하다며 넋을 놓고 보고, 또 본다). 이처럼 한 호, 한 호, 공을 들인 흔적이 엿보이는 만큼 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계간 미스터리》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해주세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