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사랑의 말들
김달님 지음 / 미디어창비 / 2023년 9월
평점 :

기억이 우리를 자라게 할 거야!
사람으로 기억되는 이야기들로, 오늘도 나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에세이!
첫째 아들이 하교할 즈음이면 나는 꼭 마중을 나간다. 아이와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나 내가 오전 동안 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즐겁다. 붙임성이 좋은 편인 아이는 마주 오는 어르신에게 항상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이의 인사에 어르신들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덕담 한 마디나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간식을 꺼내 건네신다. 사실 어른인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인데, 번번이 아이를 따라 강제 인사를 하는 격이 되고 말지만, 덕분에 처음 보는 이웃 어르신들과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며 다정한 온기와 명랑한 기운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건네는 덕담 안에서 아이가 자라나고, 이웃의 자리를 기억하며 연결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면 이 사소해 보이는 인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김달님의 에세이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속에는 이런 글이 있다. 초등학교 교사인 친구가 반 학생들과 ‘능력치 그래프 활동’을 했는데, 육각형 그림이 인쇄된 투명한 OHP 필름에 아이들이 선생님이 불러주는 능력을 적고 꼭짓점에 적힌 능력마다 내가 가진 능력치는 어느 정도인지 눈금에 표시해 보기로 했단다. 그런 다음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로 도형을 칠을 한다. 완성된 도형을 보면 아이들이 스스로 어떤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지, 상대적으로 어떤 능력에 자신 없어 하는지 볼 수 있다.
중요한 건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아이들은 모둠별로 완성된 OHP 필름을 챙겨 교실 창가로 간다. 그리고 여러 장의 필름을 하나로 겹친 다음 손을 뻗어 햇빛에 비춰본다. 그러면 혼자서는 채워지지 않았던 육각형의 빈자리가 여러 색깔로 채워지는 걸 볼 수 있다. 내가 잘하는 걸 옆자리 친구는 못하는 바람에, 또 앞자리 아이가 못하는 걸 내가 조금 더 잘하는 덕분에 육각형이 꽉 찬 색깔로 물드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나의 빈 부분을 채워줄, 내가 못하는 걸 잘하는 여러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게 된다. 세상 속 우리는 모두 이렇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걸,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고, 조금 더 다정한 말들을 건네면서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걸 감각되는 거다.
나는 그런 게 좋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가 어떤 삶들과 함께 살아가는지 구체적으로 감각하게 되는 순간이. 내가 모르는 인생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찾아오던 놀라움과 부끄러움. 그와 동시에 또렷하게 생겨난 삶에 대한 애정과 의지가. / 91p
그만두지 않고 여전히 음악을 하는 사람이 있다.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무언가를 만들고, 공간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있다. 그 옆에서 나도 외롭지 않게 글을 쓰며 살아간다. 계속 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도 해볼 만하다는 걸 느낀다.
그러니 다들 지금 그 자리에서 오래오래 ‘하던 거’ 하며 살아가기를. ‘거기 가면 볼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시시하지만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느슨하고 애틋하게. 그들을 우정하는 마음으로. / 212p



바로 그런 이야기다.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이야기들로, 오늘도 나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모르는 인생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찾아오는 놀라움과 부끄러움, 동시에 또렷하게 드러나는 삶에 대한 애정과 의지들, 또 다음을 기약하게 하는 만남 같은 글들로 마음을 쓰다듬는다. 여든셋의 나이에도 여전히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기를 꿈꾸는 이, 매일 반복되는 노동뿐 아니라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하루와 그렇게 쌓여가는 자신의 삶 속에서 ‘정성’의 의미를 보듬는 이, 예상했던 공모전에서 최종 탈락한 뒤 다음에 또 도전할 거냐는 질문에 “지금은 되게 하는 것이 나의 몫이야.”라고 덤덤하게 다짐하는 이까지. 김달님의 글 속에는 사람이 있고, 이웃이 있고, 또 그 안에서 자라는 ‘나’가 있다.
“틀리면 부끄럽지 않았어?”
“부끄럽지 않았어요.”
“왜?”
“왜냐하면 저는 배우는 중이니까요. 원래 배울 때는요, 어려운 거예요.” / 97p
가능성이라는 건 원래 내게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생겨나기도 한다는 걸 피아노를 배우며 알게 되었다. / 98p


책을 읽으며 내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은 무엇인가를 내내 생각했다. 나는 내 안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오늘도 묵묵하게,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이 계절, 다정한 글 귀 하나에 위로 받고 또 희망을 얻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