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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새와 소년에 대해
장아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8월
평점 :

나를 지킨다는 것은 곧 우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기적이라 여기게 되는 힘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 서로를 좀 더 이해해 보려는 힘을 발견하게 되는 소설!
리본을 하나 준비하는 거야. 색은 상관없어.
적당한 길이로 자르기만 하면 돼.
그 리본을 나무에 매어놓는 거지.
그런 다음 소원을 비는 거야. 큰 소리로, 또박또박. / 13p
희미는 그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산책로를 걷다 샛길로 빠지면 나오는 언덕 위에 있는 신목(神木)이다. 수령이 오백 년이 넘는다고 했다. 희미는 해가 지고 난 후 몰래 집을 빠져나와 신목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리본을 달기 위해 휴대폰 플래시로 비추자 나무 가지마다 형형색색의 리본이 묶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무는 누군가의 기도와 바람을 품고 이토록 오랫동안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걸까.
“간절하게 원하면 이루어진다면서요, 그렇죠?” 준후가 나를 고백하게 해주세요, 좋아하게 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그러자 어디선가 그래, 그래, 그래, 맞장구를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신목의 효험을 믿어보는 것도 잠시, 희미는 뜻밖에도 준후와 민지가 함께 나란히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질투심을 참지 못해 그 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말았다. 너 나 좋아해? 당황한 준후가 대답을 회피하자 희미는 그만 화가 나서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버리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그 순간, 믿기지 않게도 준후가 갑자기 곤줄박이 새로 변해변하는 게 아닌가. 그때 희미의 귓가에서 또 한 번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래, 그래. 맞장구치는 듯한 소리 같은 것이.
처음엔 혼자, 그다음엔 셋이 한마음으로 비는 소원
『별과 새와 소년에 대해』는 무심코 뱉어버린 소원 때문에 일어난 사고를 바로잡기 위해 함께 고군분투하는 세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판타지소설이다. 어쩌다 준후가 새로 변해버린 사실을 공유하게 된 이유로, 성격도 다르고 평소 친밀하지도 않았던 세 소녀가 준후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합심해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자신의 감정이 더 소중해서 타인의 감정을 살피지 못했던 희미, 새를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거리를 두는 게 편했던 민진, 고양이에게는 다정하지만 타인의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던 새별, 이들은 시종 어긋나는 듯 보이지만 각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지키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한 데 모여 마침내 눈부신 빛을 발화한다. 소설은 이 별빛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광경을 마법처럼 그려나간다. 덕분에 우리 자신을 기적이라 여기게 되는 힘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 서로를 좀 더 이해해 보려는 힘을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일주일, 길어도 일주일 뒤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뭘? 왜?”
만만찮게 화가 나 있던 민진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새별이 조바심이 날 만큼 느릿하게 대답했다.
“준후를, 준후라는 사람이 이 세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게 넋이 관계된 사건이 정리되는 방식이니까. 질서를 되찾는다고 해야 하나. 이 나무를 아주 큰 넋이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야. 준후는 앞으로 계속 새로 살아야 할 거고.” / 97p
소녀들이 묶어놓은 리본들은 하나둘 떨어지는 잎들을 대신해 나무를 지켜주었다. 바람에 맞서 더불어 반짝이며 온기를 보태주었다. 그 리본들은 각기 다른 소원을 담고 있었지만 비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었다. 기원하는 마음이란 그랬다. 빛이자 온기였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새별은 소중한 존재를 준비 없이 떠나보내는 슬픔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으니까. / 107p


특이점이라면 소원을 들어주는 신목, 새로 변한 준후, 심술궂은 가택신, 이승과 저승으로 인도하는 붉은 새와 같은 일련의 ‘환상’적인 요소들일 것이다. 이제는 미신으로 치부되곤 하는 ‘소원 빌기’, 대대로 깃들어 한 집안의 재물이나 안녕을 관장했다던 ‘신’들의 이야기, 보름달이 뜬 밤에 우물가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경을 외고 기도를 올리면서 다음 한 해도 우물물이 마르지 않기를 기원했던 ‘달그림자 긷기’ 의식 그리고 ‘넋’이라는 관념들은 오래 전 할머니가 잠자리에서 들려주던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이러한 요소들을 착실하게 하나의 스토리 위로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타인과 공동체를 이해하는 방법들을 종종 잃곤 하는 지금, 이처럼 ‘기원의 힘’을 통해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옛 사람들의 상상력을 빌리는 일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도 필요한 게 아닐까.
새 신과 옛 신이 함께 늙어가는 그 같은 이야기들은 희미의 세상을 자라게 했다. 낮잠 속으로 스며들어 웃으며 잠꼬대하게 만들었다. 어떤 옛날이야기들은 아이들을 키웠다. / 65p
“너도 기억나지? 희지랑 같이 쥐불놀이했던 거. 우물터에서 의식을 치른 적도 있다고 하고.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의식?”
“응, 신목 근처에 우물터가 하나 있거든. 언덕에 있는 큰 나무 말이야. 아주 오래된 우물이래. 그 무렵에는 우리집 우물에도 물이 차 있었다던데.” / 67p
도자기 인형이 달그락거렸다. 전등이 꺼졌다 켜졌다.
살아 있는 거야? 설마 이 집이 살아 움직이고 있어? 겁에 질려 움츠리고 있던 희미는 소파 다리를 타고 오르던 그림자를 얼결에 찰싹 후려갈겼다. 엄살을 부리듯 과장되게 몸을 떨면서 그림자는 바로 옆 벽면으로 옮겨붙었다. 액자 테두리를 따라 늘어지는가 하면 여러 개의 뭉텅이로 쪼개져 장식장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 69p



이 외에도 ‘새로이 생긴 것’과 ‘옛 것’으로 상징되는 여러 원형들이 계속해서 대비를 이루는 모습 역시 눈에 띤다.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소설의 배경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은 물줄기를 경계로 막 들어서기 시작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는 어느 도시다. 철새들이 매해 먹이를 구하러 오는 습지의 일부를 메우며 들어선 곳이다. 8차선 도로가 들어서고 곳곳에 가로등이 세워지며 거대한 빌딩이 들어서는 사이, 들쥐와 청설모 그리고 고라니 같은 존재들은 한 계절도 버티기 힘든 생태환경 속에 놓이게 되었다. 고속도로의 방음벽은 새들에게 생과 사의 장벽이 되었다. 한밤중에도 꺼지지 않는 빛은 새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신목이 죽어가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도시는 잘려 나간 나무들의 등걸 위헤 세워졌으므로, 로드킬당한 동물들의 사체 위에서 발전했으므로. 이렇듯 소설은 거대해지는 도시의 크기만큼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경계 밖으로 밀려난 존재들을 조명하며 이를 지키기 위해 뜻을 모으는 아이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한다.
신목을 지키는 나무,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고 따라서 나를 지킨다는 것은 우리를 지킨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띠었다. 신목은 사람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해줌으로써 스스로 더욱 강건해졌다. 공동체의 번영이 기도로 되돌아와 그의 넋을 윤택하게 해주었으므로. / 179p
잘못 빈 소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현실을 뒤흔드는 거대한 이야기로 나아가는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다만 소설에 쓰인 여러 환상적 요소들이 완전하게 응집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구석구석에 빈틈을 남기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쓰기 어려운 이야기를 우직하게 풀어낸 작가에게 응원을 전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