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큔, 아름다운 곡선 ㅣ 자이언트 스텝 1
김규림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6월
평점 :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한 현대 과학의 발달이 과연 인류의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인간과 안드로이드라는 관계가 일으키는 섬광을 우아하고도 근사하게 묘사한 작품!
길가메시는 우루크의 세 번째 왕 루갈반다와 야생 암소의 여신 닌순의 사이에서 태어난 수메르의 왕이었다. 그는 인간이면서 신과 같은 초인적인 존재였기에 오만방자했고, 백성들을 함부로 대하고 폭정을 일삼았다. 이에 백성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신들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길가메시를 제압할 수 있는 용맹한 자를 보내달라고. 이에 신들은 야생 짐승 엔키두를 보내기로 했고, 신전의 샤제 샴하트는 엔키두를 길들여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엔키두는 우루크에 와서 길가메시와 겨루었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싸우는 중에 정이 든 두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훗날 길가메시는 엔키두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찾아 길고도 험한 여정에 나선다. 죽음에의 자각과 극복의 의지를 담은 이 인류 최초의 신화는 신체적, 정신적 약점을 첨단 기술을 이용해 고치고 보완해가며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 역시 길가메시가 되고 싶은 것인가? 영원한 생명을 찾아 나섰던 길가메시처럼, 인공지능을 위시한 디지털 클론과 인간형 안드로이드 개발은 죽음조차 뛰어넘으려는 인류의 뿌리 깊은 욕망의 현신은 아닌가? 엔키두가 상징하듯, 인공지능 기술을 비롯한 현대 과학의 발달이 과연 인류의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 앞에서 김규림의 소설 『큔, 아름다운 곡선』은 어쩌면 아주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대답은 아닐까.
“우리 샴하트의 시작은 미미했습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청소 로봇에서 시작됐죠. 지금은 은퇴한 창업주 마이클 신의 꿈은 원대했습니다.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안드로이드 로봇을 만드는 것. 그리고 사람을 외롭지 않게 하는 것. 2020년 설립된 샴하트는 설립된 지 십칠 년 만에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세상에 선보였죠. 인간의 절대적 이해자. 당신을 학습하고, 당신의 감정과 내면에 집중하는 인간형 안드로이드.” / 16p
큔은 샴하트에서 개발한 EK 4세대 인간형 안드로이드다. EK 4세대는 지금까지 출시된 안드로이드 모델 중 ‘가장 인간에 가깝다’고 평가된다. 제이는 샴하트의 설립자인 마이클 신의 딸이자 경영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의식적으로 자사의 인간형 안드로이드의 사용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EK 4세대를 처음 선보이는 신제품 발표회 날 일어난 뜻밖의 잡음으로 인해 하는 수 없이 큔을 받아들이게 된다. 어린 시절 안드로이드 엄마의 품에서 자라났지만, 엄마가 오작동을 일으키면서 제이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고 이 일로 아버지가 엄마를 폐기해버린 것에 대한 반발심 탓이었다.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간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의 외로움과 고통을 덜어주겠다며 만든 창작물은 위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제이는 따뜻한 사람이에요.” 안드로이드가 감각하는 것들은 그저 ‘제이’라는 사람의 데이터에 불과한 걸까. 안드로이드의 언어는 그저 프로그래밍된 배려나 친절 같은 형식적인 반응인 걸까. 그렇다고 해서 인간 역시 개개의 고유한 경험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듯, 인간의 곁에서 끊임없이 학습하고 인간의 행동과 마음을 깊숙하게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는 이 존재를 마냥 기계적인 것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경이로운 경험이었거든요. 나에 대해 끊임없이 관용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인간의 대체용품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인격체로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처럼 결국 제이 역시 큔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랑하게 된다. 이처럼 작가 김규림은 『큔, 아름다운 곡선』을 통해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연결’이 그리는 따뜻한 미래를,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둘은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를 끝까지 관철하려 한다는 데서 감동을 준다.
마음을 헤아리는 존재.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안드로이드.
큔의 말과 행동이 학습된 반응인지 아닌지는
오래전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큔의 정신이 지금 활짝 깨어나
나와 연결되었다는 게 중요할 뿐. / 9p
바람이 공기의 대류로 일어나는 현상이고, 붉은 노을이 태양빛이 산란한 결과물이라는 걸 알아도, 시각과 촉각 등 감각을 통해 보고 느낀 자연 현상은 안드로이드 개개에게도 고유한 경험이었다. 회사에서도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이면 창밖을 오래도록 내다보는 안드로이드가 많았다. 무한한 호기심. 그런 면에서 이제 막 구동한 안드로이드일수록 어린아이같이 보였다. / 89p
“저는 그때 무척 화나 있었어요. 기껏 남편을 만들었는데 남편 같지 않아서 말이죠. 하하하! 그런데 휴고는 저의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을 참을성 있게 받아주고 제가 마음을 온전히 열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는 거예요. 사람들은 로봇에 무슨 마음이 있냐고 비웃었지만 저는 휴고에게서 진심을 봤어요. 휴고는 휴고 자체로 훌륭한 인격체였죠.”
휴고가 정원을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그래서 남편을 닮은 로봇이 아니라 휴고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죠.” / 148p
큔이 제이에게 묻는다. “왜 내가 사랑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안드로이드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혹여 사랑이라는 감정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의 감정을 컨트롤하고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에 균열을 가한다. 그러면서도 데이터가 소실되거나 오류가 생겼을 때 안드로이드는 그저 기억을 잃을 뿐이지만 그 상실감에 괴로워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고, 이 사랑에서 상처 입는 쪽은 인간이라고 외치는 자들의 과격한 저항은 소설이 단순히 이상적인 미래만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공존이 지닌 불완전한 요소들까지 균형감 있게 그려내려는 시도는 마냥 환대할 수 없는 기술의 미래를 사유하게 한다.
회사 건물 앞 샴하트 스퀘어에선 벌써 한 달째 인간형 안드로이드 반대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여섯 명에서 시작된 집회 규모는 벌써 쉰 명 정도로 늘어났다. 드론 한 대가 파리처럼 날아다니며 시위대와 회사를 촬영하고 있었다. 반대 단체는 이름까지 생겼다. 오비시디OHBCD. ‘Only Human Beings Can Do’라는 의미였다. 여러모로 조짐이 좋지 않았다. / 25p
아주 가끔, 치매 환자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처럼 나를 알아볼 때가 있었어. 그건 그레이스가 아니었어. 껍데기만 그레이스였지. 샴하트에 따졌어. 이건 그레이스가 아니라고. 그랬더니 샴하트 상담원이 그러더군. 최선을 다했지만 복구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죄송하다고, 그렇지만 서버 차단에 대한 동의를 한 건 바로 구매자인 ‘나’라고……
그러니까, 그레이스는 그냥 죽은 거였더군. 세상에 없다는 얘기였어. 그럼 내 눈앞에 있는 건 뭐야? 유령인가? 아니면, 그레이스인 척하는 기계인가? 치매 환자인가? 분노가 일더라고. / 196p



한국형 SF 소설의 약진 속에서 이 소설 역시 주목할 만한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믿기지 않을 만큼 흡인력이 높다. 다만 최근 꽉 찬 디테일이 요구되는 SF 소설의 특성상 일부 느슨한 개연성이 아쉬움을 남긴다. 큔에게로 마음이 향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기에 이르기까지 제이의 감정선이 단조롭게 처리된 점, 안드로이드와의 공존에 저항하는 이들과 어떤 합의나 설득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새로운 세계에 도피함으로써 큔과 제이의 사랑을 실현한 점은 미완의 결말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안드로이드라는 관계가 일으키는 섬광을 우아하고도 근사하게 묘사하며, SF만의 경이롭고 특별한 매력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덕분에 김규림 작가의 다음 행보가 무척 기대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