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모양으로 찻잔을 돌리면
존 프럼 지음 / 래빗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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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상상력과 신화적 사고를 절묘하게 결합한 완성도 높은 SF문학!

김초엽천선란김청귤여기에 나는 존 프럼의 이름을 더하려 한다!

 

 

 

  생체 분해까지 4분 59, 4분 58, 4분 57……망했다완전히 망했다.

  ‘는 4세기 하고도 50년을 더 살았던 생을 뜻밖의 전송 오류로 마감하게 되었다는 것에 낙담한다이미 5분 전에 자신의 몸을 이루는 생체 패턴 정보가 클라우드를 통해 달로 제대로 전송되었고정상적이라면 출발지인 지구에 있던 자신은 분해되었어야 마땅하다테세우스법에 따르면 한 인간이 동시에 둘 이상의 개체로 존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니까그런데 분해 과정 속에서 오류가 발생해 의도치 않게 또 하나의 개체인 가 지구에 남게 되었으니아예 부스 안에서 폐기될 운명에 처해지고 만 것이다표제작인 영원의 모양으로 찻잔을 돌리면은 복제기술과 생체 정보 전송을 통한 차원 이동오류나 포맷이 되지 않는 한 영생을 꿈꿀 수 있는 최첨단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복제 인간인 주인공이 뜻밖의 전송 오류로 디지털 유령 신세가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소설은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이른바 테세우스법으로부터 제기되는 의문이다고대 아테네인들은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귀환한 영웅 테세우스의 배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조금씩 수선한다그 과정에서 낡은 부품들이 서서히 교체되는데오랜 세월이 흐르자 배를 이루던 원래 부품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그렇다면 이 배를 과연 처음과 같은 배라고 할 수 있을까형태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후대의 배는 원래의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이렇게 영웅이 탔던 배와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테세우스의 배는 논리적인 모순을 지니게 된다.

 

 

 

  인간의 생체를 무한히 복제할 수 있는 첨단 과학의 시대를 맞이한다 하더라도복제되면서 서로 다른 줄기로 분기한 두 인간이 함께 존재함으로써 야기되는 혼란은 결국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모순에 처할 수밖에 없다존 프럼은 바로 이러한 모순을 제기하며인간을 복제할 경우 즉시 원본의 의식을 클라우드에 동기화하는 동시에 원본을 파기해야 한다는 테세우스법을 소설 속에 정립한다하지만 주인공인 는 오류로 인해 파기되지 않고 살아남아 디지털 유령 신세인 잉여 인간으로 전락하고결국 복제의 세계를 거부하는 게토의 영역으로 들어가 자신을 소멸시키기로 선택한다그러나 유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게토에서는 다시금 영생을 갈구하는 복제 세계로 이행하고픈 뫼비우스의 굴레에 빠지고 마는데끝나지 않는 역설의 항로 속에서 분해와 재생을 거듭하는 테세우스의 배를 타고 영원히 해맬 수밖에 없는 ’, 어쩌면 우리 모두야말로 그 굴레 안에서 끝없이 맴도는 저주에 걸린 존재는 아닐는지.

 

 

 

5분 전에 나는 바로 이 전송 부스에서 클라우드를 경유해 달로 전송되었다세포 하나하나가 전송된다는 것은 아니다전송되는 것은 내 몸을 이루는 생체 패턴 정보이다달에 있는 수신기는 지구에서 송신된 정보를 바탕으로 라는 인간을 생체 프린트한다법률상 한 인간이 동시에 둘 이상의 개체로 존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니목적지인 달로 전송되는 순간 전송 부스는 출발지인 지구에 있단 인간을 분해해버린다나는 5분 전에 이 부스에서 이미 한번 분해되었다하지만 망할 놈의 전송 오류로 인해 달과 지구두 곳에서 프린트 되어버렸고이쪽에 있는 나는 겨우 5분 만에 폐기될 운명에 놓인 것이다. / 영원의 모양으로 찻잔을 돌리면」 중에서 63p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어쩌면 또 하나의 테세우스의 배가 존재하지 않았을까하는 그런 의문이배를 수선한 누군가가 원래의 부품을 따로 모아서 조립한다면 그 배 역시 테세우스의 배가 아닐까테세우스의 배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지 않을까테세우스법은 두 번째 배를 무조건 폐기하는 대신영원의 요람에 독자적인 자리를 마련해줘야 하지 않았을까. / 영원의 모양으로 찻잔을 돌리면」 중에서 98p

 

 

 



 

 

 

 

  이처럼 존 프럼은 자신의 소설집을 통해 인공지능분자 프린팅가상현실복제인간다차원 세계 등을 위시하여 고도로 발달된 미래 사회의 모습과 그것이 지닌 윤리적인 문제그 안에서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한다로그아웃하시겠습니까?에서는 내 인생이 내가 설정한 난이도의 게임이라면?’과 같은 가정 아래서무엇이 게임 속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혼란을 느끼기 시작한 주인공이 극한까지 내몰림으로써 마침내 자아가 분열되고 마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유사한 형태의 소설 나의 디지털 호스피스」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바이트만큼 원하는 시나리오를 구입해 살 수 있는 뉴 리얼리티의 세계 속에서진짜 현실과 가짜 현실이라는 함정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뇌를 현실감 있게 담아낸다신의 소스코드에서도 지구를 포함한 우주 전체가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실은 프로그램화된 디지털 세계에 불과하다는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통해 누가 전원 코드를 뽑아서 세상이 사라지면 어떡하지?”와 같은 섬뜩한 공포를 마주하게 한다.

 

 

 

라플라스는 날이 갈수록 거대해져만 갔다만물의 방정식을 응용해 우주를 해킹하는 기술을 보유한 것은 오직 라플라스뿐이었기에 경쟁자 따윈 없었다라플라스는 DU에서 채굴한 몇몇 핵심 기술을 바탕으로 점점 빠르게 더 많은 소우주를 만들어냈고그로 인해 더 많은 기술을 채굴하는 무한한 사이클에 들어섰다누구도 멈출 수 없는 라플라스의 폭주는공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플랑크 길이에서 무한히 진동하며 우주를 존재케 한다는 뫼비우스 모양의 리본형 초끈처럼 무한한 궤도 위에 올랐다. / 회귀」 중에서 188p

 

 

 




 

 

 

 

  「신의 소스코드에서 철학 교수이자 뇌과학자인 대니얼 핸슨은 이렇게 말한다. “한때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어. (그로부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지구가 숱한 행성 중 하나에 불과하나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다시 한참이 지나서야 우주를 탐험하기 시작했지다시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우주를 포함한 모든 세계가 시뮬레이션 안에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어그리고 이제는 다차원 구조에 관해 알게 되었지만여전히 많은 것들이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자신들의 거대한 질서 속에 개인을 철저히 이속시키려 하면서도 끊임없이 분열을 가한다신의 소스코드를 뒤져가며자신의 꼬리를 먹고 자라는 우로보로스 밖으로도넛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연구했던 안나 한처럼 우리는 세계 너머를 자주 의식하며 테세우스의 배에서 탈주를 감행하는 위대한 모험가가 될 수 있을까이제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했듯 자유의지란사실은 환상에 불과할까물리적 인과의 연쇄 작용은 자유의지가 끼어들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걸까설령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끔찍한 환경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정말로 자유로운 것일까.

(어쩌면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자유의지라는 것은 인간이 짊어지기엔 너무나도 무거운 짐은 아닐까. / 회귀」 중에서 207p

 

 

어떤 신비한 초월자가 아닌나와 같은 프로그래머가모니터 앞에 안장 키보드나 두드리는 너드 따위가신의 자리를 대체한다는 것은 어딘가 쿨하짐 못한 구석이 있었으니까요나처럼 두꺼운 안경을 쓰고 키보드 앞에 앉아 있는 너드가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땀에 전 티셔츠를 입고 있는 컴퓨터광이우리의 조물주라니……. / 신의 소스코드」 중에서 268p

 

 

 

  과학적 상상력과 신화적 사고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SF를 상당히 완성도 높은 문학적 장르로 이끌어낸 작가의 필력이 예사롭지 않다최근 한국 문단에서 SF의 존재감이 점차 두드러지는 가운데 또 하나의 결을 꿰차며 자신만의 세계를 밀고 나가는 과단성에 응원과 박수를 보낸다사실 리뷰에 쓴 말보다 하지 않은 말이 더 많다한 권의 책에서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좋은 작가를 얻었다는 뜻이 아닐까이름을 보고 외국 작가인줄 알았는데 실은 필명이었다는 반전이 작가에 대한 신비로움을 더하는 만큼앞으로도 놀랍도록 신선한 작품을 더 많이 내어주시길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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