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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문장 - 작고 말캉한 손을 잡자 내 마음이 단단해졌다
정혜영 지음 / 흐름출판 / 2023년 6월
평점 :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오늘의 모습을 보듬는 시간!
아이의 언어를 듣고, 마음을 읽는다는 건 과거의 나를 마주하고 화해하는 일이다!
“엄마, 내가 이거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 다섯 살이라서 그래.”
“엄마, 내가 이거 어떻게 들 수 있는 건지 알아? 다섯 살이라서 그래.”
오늘도 둘째 아들의 ‘다섯 살’ 부심은 끝이 없다. “대단한데? 우리 아들 열 살 되면 힘이 어마어마해지겠는데?” 하고 맞장구치면 단숨에 아이의 얼굴에 기대감이 넘쳐흐른다. 엉뚱하지만 재기 넘치고, 무람없지만 편견 없는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언어를 마주하는 순간은 육아의 큰 기쁨 중에 하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하고 크게 웃다 보면 하루의 시름과 고단함이 언제 그랬냐는 듯 누그러진다.
때때로 아이의 언어를 듣고, 마음을 읽는다는 건 과거의 나를 마주하고 화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이 작은 아이였을 때도 주변 어른들의 아낌없는 박수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향한 기대 속에서 무럭무럭 컸겠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당장의 칭찬을 즐기기 보다는 더 잘 해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현실이라는 무게와 가능성 사이를 저울질하곤 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이 나를 향해 보여주셨던 한결 같은 믿음의 크기가 세상 그 무엇보다 컸음을 잘 알고 있기에 나의 아이들에게도 꼭 그러한 믿음을 줄 수 있는 부모가 되리라 다짐해본다.
세상에 어린이가 아니었던 어른은 없다.
어른이 어린이의 마음을 만난다는 것은
각자의 어린 시절과 조우하는 일이며,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오늘의 모습을 보듬는 일일지도 모른다. / 10p
아이들의 언어 속에서 나의 마음을 길어 올리다
제10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인 『어린이들의 문장』은 23년 차 초등학교 교사가 쓴 에세이다. 오랫동안 교단에 몸담으며 아이들의 보석 같은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저자는 그 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오늘을 보듬어보게 되었다고 한다.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현재의 자신을 좀 더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이다. 때문에 앞만 보며 뛰어가느라 지쳐버린 어른들, 성장통을 겪고 있는 어른들이 어린이의 글과 문장을 만나 스스로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네줄 수 있기를 전한다. 궁금한 것투성이인 아이들의 유쾌 발랄한 호기심과 나름의 분투로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모습, 때로는 ‘아저씨가 수염을 깎은 냄새’ 같이 감히 상상해본 적도 없는 엉뚱한 표현들까지. 밤하늘의 별빛처럼 책을 가득 수놓은 아이들의 반짝이는 문장들을 대하다 보면 어느 새 진솔한 언어와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돌려 말하지 않는 단순함. 그것에 진실한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신비주의를 사양하는 어린이의 문장에서 투명한 어린이의 마음을 읽는다. 어린이의 생각이 솔직하게 일어난 자리. 그곳이 어른이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아야 할 곳이다. / 193p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실수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 힘겨울 때가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1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이 작은 아이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어제, 아홉 살 된 나의 아이는 하필이면 잠시 컨디션 난조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눈물을 보였다. “한 번 더 할 수 없을까?”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아이에게, 너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기회는 공평해야 하고 오늘의 결과를 밑거름 삼아서 다음 대회에서는 좀 더 보완해서 도전하면 되는 거라고 설득시키는 게 참 어렵지만 부모인 나는 그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아이는 눈물을 삼키며 또 다른 종목에 도전하기 위해 일어섰다. 최선을 다했는데 모든 것이 일시에 어그러져버린 것 같은 순간, 도대체 잘못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누구를 탓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답답한 마음, 공들인 시간이 무색해지는 허탈한 마음을 삼키고 또 다시 일어서는 법을 아이는 일생을 통해 배워나가겠지.
[ 아침에 조금 늦은 시간 때, 나는 어린이날 비행기 대회에 참여했다. 내 종이비행기가 대회 전에는 잘 날아갔는데 대회에서는 조금 날아가서 아쉬웠다. ] / 33p
책 속의 별이도 어린이날 비행기 대회에 참가했다가 평소에는 잘 날아가던 종이비행기가 하필이면 대회에서는 조금만 날아가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100시간을 연습했더라도 20분 남짓한 시간의 결과만을 평가하고 상을 주는 것이 어린이날에 어린이를 위한다고 열린 대회의 취지에 맞는 것인지, 모두를 격려해주는 방식일 수는 없었던 것인지 어른들의 성숙하지 못한 태도에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저자의 말처럼, 모든 과정은 공들인 사람 본인만이 아는 법이지만 그렇게 애쓴 노력의 결과가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은 아닐지라도, 모든 작고 기특한 애씀을 소홀히 하지 않는 사회의 시선이 보다 더 필요한 때인 듯하다.
의심해야 할 것은 어떤 일에 대한 내 재능의 유무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데 내가 재미를 느끼는가’이다. 정세랑 작가도 《시선으로부터,》에서 말하지 않았나.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 37p


광석을 캘 때 광물이 섞여 있지 않아 쉬이 버려지는 잡돌을 ‘버력’이라 한다. 저자는 안희연 작가의 산문집 《단어의 집》에서 만난 이 ‘버력’이라는 낱말에 주목한다. 하지만 ‘버력’에는 우리가 이제껏 몰랐던 또 다른 뜻도 있다. ‘물속 밑바닥에 기초를 만들거나 수중 구조물의 밑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돌멩이’를 ‘버력’이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아이들이 ‘버력’이라는 단어를 통해 세상엔 광물 같은 존재도, 버력 같은 존재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아울러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스스로를 버력 같은 존재로 여기곤 하는 청춘들의 지친 마음에도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너무 모든 전투에 다 싸워 이기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어느 하나 쓸모없는 분투 따위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우리 아이도.
의학 박사이자 미국놀이연구원의 창설자 스튜어트 브라운 박사는 “놀이의 반대는 일이 아니다. 놀이의 반대는 우울증이다.”라고 했다. 제대로 놀지 못하면 일을 제대로 못할 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뜻일 것이다. 어른에게도 놀이가 필요한 이유다.
무엇을 할 때 가장 신나는가? 어떤 것을 하며 놀 때 몰입하는가? 어떤 것에 미치는지, 좋아 죽겠는지, 그것을 먼저 살펴보고 제대로 놀도록 돕는 것. 어린이에게도, 어른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 121p
[ “엄마한테 혼나서 방 안에 혼자 들어가 울고 있었어요. 엄마가 미워서 밥도 안 먹고 방 안에서 안 나갔는데 오빠가 자꾸 문을 열고 들어와서 하리보를 줬어요. 하리보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거든요.” (좀 전에 오빠 때문에 억울했던 일을 호소하던 아이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는데 모르는 애가 저한테 막 뭐라고 나쁜 말을 했어요. 그때 누나가 그 애한테 큰소리로 혼내줘서 그 애가 울면서 집에 갔어요.” (사춘기에 접어든 누나가 평소에 자신에게 퉁명스럽게 대한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던 아이다.) ]
부정은 쉽고 긍정은 어렵다. 그래도 좋은 점을 찾으려고 애쓴다면 못 찾을 리 없다. 그렇게 한 뿌리와 줄기에서 나와 다른 가지로 자란 이들은 자주 서로를 못 견뎌하면서 또 자주 서로의 양분을 나누며 살아간다. / 129p
한때는 나의 문장이었을지도 모르는 어린이들의 문장을 읽으며, 어른들의 세계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던 나의 작은 용기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어졌다. 오늘 내가 내딛는 자리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때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다정한 언어로 내 여린 마음에 말을 걸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라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