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동체라는 감각 혹은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 따위가 무의미해진 척박한 지하 도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가장 여린 존재들에게!
이런 작가가 우리 시대의 젊은 작가라서 참 다행이고, 고맙다!
“우린 산 채로 묻힌 거야. 이런 걸 산송장이라고 한단다.”
하늘을 본 적이 없으니 하늘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바다를 본 적이 없으니 헤엄치고 싶다는 것은, 드넓은 대지를 본 적이 없는데 마음껏 뛰고 싶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일 테지만, 인간에겐 유전으로 학습된 기억이란 것이 있어 지금의 지하 도시인들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짓지도 않은 형벌을 받아야 하는 인류가 되어버렸다. 지상이 멸망한 뒤 인류는 지하에서 삶을 연명하는 길을 택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추방된 쪽에 더 가까울지도.
정확히 언제 그들이 지하로 들어왔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지금, 지상을 탐사하는 선발대 모집은 6년 전을 끝으로 기약이 없고 우주 탐사대 역시 완전히 죽어버린 직업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인구가 늘어 포화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허가받은 아이만이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제한된 인구 정책, 엄지손톱만한 칩을 심어 철저한 감시와 통제로 이루어진 사회 구조, 지하 도시 생활의 유지에 필요한 VA2X를 복용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에게 엄격한 경제 활동이 요구되는 이곳에 자유와 인권은 자연히 사치다. 이것이 지상이 멸망한 뒤 지하 도시로 들어간 인류의 모습을 담은 연작소설집 『이끼숲』이 그리는 기후 위기 시대 이후의 미래다.
어디에도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사막화가 되어버린 인류의 미래를 담아낸 전작 『랑과 나의 사막』에 이어 이번에는 절멸된 지상 그 이후의 세계를 그린 『이끼숲』으로 돌아왔다. 전작의 배경이 되었던 사막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 편의 연작소설집의 배경이 되는 지하 도시 세계 역시 숨 막힐 듯 사실적으로 묘사한 천선란 식 SF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집이다. ‘나태함과 무기력함, 게으름과 우울’이 가장 무서운 ‘전염병’처럼 나도는 지하 세계, 출구도 희망도 없이 오직 절망만이 일상의 공기처럼 떠도는 이 ‘닫힌 세계’를 기어코 목전에 둔 우리의 낭패감을 이미 봐버린 듯한 기분이랄까. 그래서 읽는 내내 가슴이 무겁고 목이 조이는 듯 갑갑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나는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인간 복제는 인간의 한계 같아. 그 한 사람을 온전히 살릴 수 있다면 아무도 인간 복제 따위는 하지 않으려 할걸. 인간은 영생에 실패했고, 뇌 정복에 실패했어. 전부 다 실패했어. 고작 똑같은 인간 만들고 땅이나 파고 있다니. 최악의 진화 아니니? 이런 세상인 줄 알았으면 태어나지 않았을 건데. 너는?”
은희는 웃으며 물었다. 마르코는 여태껏 인간의 발전과 진화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생각해본 적 없었다. 태어나보니 이곳이었다. 마르코의 삶 전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선택권이 결여된 순간이 그때일 것이다. 탄생. 만약 선택권이 있었다면 자신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 「바다눈」 중에서 69p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칩에는 이름과 출생일과 고유 아이디가 들어 있어서 구역과 구역을 나누는 게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인식된다고 했어. 그게 꼭 있어야 한다고. 그게 없으면 ‘정체불명’ 혹은 ‘미입력자’‘불법 거주자’‘비시민’‘침입자’ 따위가 되어 체포된다고. 그다음은 몰라. 어디로 잡혀가서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보나마나 죽겠지. 지하 도시가 이미 추방된 곳인데 여기서 어디로 또 추방할 수 있겠니? / 「우주늪」 중에서 113p



「바다눈」 속 주인공인 마르코는 생명공학 연구소 빅터의 경비원으로 취직한다. 그는 매일 철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상상한다. 마르코로서는 인간의 유전 정보를 떼어다 똑같은 인간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어떤 상상이든 결국 인간의 몸을 조립하고, 아바타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사고 팔 수 있는 이 세계를 영원히 납득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한편, 「우주늪」에는 태어나서는 안 되는 아이로 태어난 죄로, 배관 통로를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평생을 숨어서 살아야하는 의조가 등장한다. 엄마는 어린 의조에게 ‘악어떼’ 노래를 부르며 엉금엉금 기렴, 악어처럼, 엉금엉금 기어가렴, 하고 속삭인다. 의조는 자신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는, 우주 같은 배관 통로를 하릴없이 엉금엉금 기어가는 우주 찌꺼기 같은 존재라 생각한다. 아니, 존재로 입증될 수 없으니 존재라고도 명명할 수 없는 ‘제로’에 가까울지도. 이렇듯 「바다눈」, 「우주늪」, 「이끼숲」으로 이어지는 세 편의 소설은 공동체라는 감각 혹은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 따위가 무의미해진 척박한 지하 도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여린 존재들을 조명한다.
“구하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이야기는 끝내 구하는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더 뚜렷하게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하지만 천선란 작가가 스스로 “구하는 이야기를, 조금 더 뚜렷하게 구하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듯,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힘껏 껴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존재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며 주저앉은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크게 일으킨다. ‘과거는 우주와 같아서 우리는 걸어 그곳에 갈 수 없고, 네가 꿈꾸는 아름다움은 만질 수 없는 별과 같아서 실체를 마주하기 위해 걸음을 내딛는 순간 실망만 가득할 거라는 걸’ 알지만, 그들은 서로의 마음에 가 닿기 위해, 서로를 알아본 마음을 향해 나아간다. 세계를 지배한 절망보다 나약하게 핀 희망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그들은 “살아 있는 모든 작은 것들은 강하다”던 믿음을 실현한다. 너무나 눈부시게.
나는 방금 말한 것들이 간절했지만,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이곳은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그 애를 잃은 슬픔이 유별나다. 분하고 억울하다.
슬픔이 유별나도 되는 곳으로 가고 싶다. / 「이끼숲」 중에서 232p
소마, 나는 우리가 이끼였으면 좋겠어.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바위틈에도 살고, 보도블록 사이에도 살고 멸망한 도시에서도 살 수 있으면 좋잖아. 고귀할 필요 없이, 특별하고 우아할 필요 없이 겨우 제 몸만한 영역만을 쓰면서 지상 어디에서든 살기만 했으면 좋겠어. 햇빛을 많이 보기 위해 그림자를 만들지 않고, 물을 마시지 못해 메마를 일도 없게. 그렇게 가만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거야. 시시하겠지만 조금 시시해도 괜찮지 않을까? / 「이끼숲」 중에서 247p


화려한 꽃을 피우거나 거대하게 뿌리를 내리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다. 가장 어둡고 낮은 곳에서, 축축한 틈 곳곳에서 멸종되지 않고 제 몸만한 영역만을 쓰면서 어디서든 살아가는 이끼 같은 마음들이 때로는 더 강한 법이다. 거듭된 여러 편의 작품 속에서 작가 천선란이 보여주는 이 견고한 믿음이 참 좋다. 이런 작가가 우리 시대의 젊은 작가라서 다행이고, 고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