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일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9
기 드 모파상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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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생의 길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근사한 가면으로 치장되는 인간의 비겁함위선욕망의 허울들을 관조적이면서 성숙한 시선으로 엮어나간 모파상의 대표작!

 

 

 

 

  독서모임 책으로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선정해 읽기 시작했다그런데 이 기시감은 대체 뭘까플롯이나 등장인물 그리고 배경이 낯설지 않다고개를 갸웃거리며 3분의 정도의 내용을 읽어나갔을 즈음나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간에 써왔던 리뷰들을 모은 블로그에서 모파상을 검색했다아니나 다를까 몇 해 전에 이 작품을 읽은 적이 있었다그런데 왜 내가 기억하지 못했을까를 생각해보니당시에 읽은 책은 어느 인생(백선희 옮김새움)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기 때문이다얼핏 보면 어느 인생과 여자의 일생은 한 작품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만큼 거리감이 있는 것이어서 나는 어째서 이토록 다른 제목을 붙였을까를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이 작품에 저자가 붙인 제목은 ‘Uni vie’, ‘어느 인생’ 혹은 어떤 일생’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그만큼 모파상이 제목에서 고유명사를 배제한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텐데 다수의 출판사가 여자의 일생을 관습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자칫 한 여주인공의 개별적 인생을 여자의 일생으로 일반화시켜버릴 수 있는 해석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그건 아마도 잔느라는 여성의 일생을 중심으로당대 여성들의 공허하고도 고독한 일상에 깃든 우수를 담아내고자 한 모파상의 통찰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제목이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그는 곧잔느를 통해 여성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 바라볼 것인가를 독자로 하여금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반면 어느 인생이란 제목으로 바라보자면특정 시대 속의 여성들로 이야기를 한정하지 않고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이고 보다 본질적인 인간의 삶 전체를 조망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착오 덕분에 한 작품을 두 번 읽게 된 나는 첫 독서에서는 여주인공의 기구한 운명과 불행에 몰입하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을 두 번째 독서를 통하여 좀 더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계기가 얻었다이래서 책은 여러 번 읽을수록 좋다는 말이 있는가보다심심한 듯 음울한 느낌이 단조롭게 펼쳐지는가 싶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캐릭터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살아 숨 쉬시는 듯하고마침내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닙니다.”로 귀결되는 장면은 인생이라는 모진 풍파 속에서 건져 올린 감회가 이토록 생생한 울림을 주는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소설은 운명 같은 사랑을 꿈꾸던 잔느가 비슷한 계층의 자작인 쥘리앵을 만나 불행으로 점철된 결혼 생활을 하다 점차 쇠락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중심 서사는 주인공인 잔느를 따라 연대기적으로 흘러가지만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세밀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 모파상의 디테일이 단연 돋보인다비만 때문에 안락의자에 붙박여 지내게 되자 과거에 자신이 가장 예뻤던 시절에 주고받았던 여러 비밀 편지와 몽상에 빠져 지내는 남작 부인,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크게 산 것도 없는데 오늘도 100프랑이나 써 버렸단 말이야.” 같은 말을 하면서도 현실 감각이 없는 특유의 선량함 때문에 돈이 새어 나가는 줄도 모르는 남작극도로 인색하며 가족에 대한 헌신보다 자신의 욕망을 더 앞세우는 쥘리앵아무도 존재 자체를 신경을 쓰지 않아 살아 있는 가구 취급을 받는 리종 이모 등이 그러하다.

 

 

 

얇은 옷 속으로 억센 골격이 두드러져 보이는 키 큰 어부 아낙네들이 마지막 어부가 출발할 때까지 머물러 있다가왁자지껄하게 캄캄한 거리의 깊은 잠을 깨우면서괴괴한 마을로 돌아갔다.

남작과 잔느는 우두커니 서서 그 사람들이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매일 밤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나가지만너무 가난해서 평생고기도 먹어 보지 못하는 것이다. / 138p

 

 

그녀는 바늘로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돈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그런 행위가 천하고 추하게 보였다. “돈이란 쓰라고 만들어진 것이란다.”라는 엄마의 말을 그녀는 얼마나 자주 듣고 자랐던가그런데 이제 쥘리앵이 그녀에게 거듭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함부로 돈을 낭비하는 버릇을 고칠 수 없겠소?” 그리고 임금이나 상품 가격에서 돈 몇 푼을 깎을 때마다 그는 자기 주머니에 잔돈푼을 굴려 넣으면서 미소를 띠고 선언하듯 말했다. “작은 개울물이 큰 강을 이루는 법이거든.” / 142p

 

 

 

  소설 속 인물들은 모파상이 당대의 풍속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쓰임새도 없는 가구들로 넘쳐나는 넓은 거실 속에서 프랑스 전국에 흩어져 있는 귀족 친척들에게 편지나 쓰며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격식을 차리는 일에 여념이 없는 귀족들은, 19세기 국가 체제의 변화와 귀족 시대의 몰락 앞에서 더없이 무력한 이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장인어른이 재산을 낭비해서 가진 것을 탕진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런 처지에 빠지진 않았겠죠장인어른이 파산한다면 누구 잘못이겠어요?” 와 같이 장인을 향한 쥘리앵의 맹렬한 일침은 현실감 없는 귀족들의 무지를 드러낸다. “이 고장 계집애들치고 임신하지 않고 결혼하는 애는 없답니다.” 고을의 처녀들을 싸잡아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며 쥘리앵의 간통을 정당한 것으로 무마하는 신부의 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성폭력의 역사를 들추어보게 한다이렇게 소설은 근사한 가면으로 치장되는 인간의 비겁함위선욕망의 허울들을 관조적이면서 성숙한 시선으로 엮어나간다이것이 자칫 통속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 소설이 지닌 남다른 힘이다.

 

 

 

남작의 맹렬한 기세에 놀란 쥘리앵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쥘리앵이 좀 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그렇지만 1500프랑이면 충분하고도 남습니다계집애들은 모두 결혼하기 전에 애를 낳아요그러니 그게 누구 자식이건 별로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2만 프랑 가치가 있는 농장 하나를 준다면우리 내외가 입는 손해는 고사하고 세상 사람 모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얘기해 주는 셈이라고요적어도 우리 가문과 우리 위치를 생각하셔야죠.” / 188p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죽었을 거야.” 누군가가 그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고 끼어들었다그러자 거지 영감이 무섭게 화를 냈다. “왜 그 편이 낫다는 거야나는 가난하고그자들은 부자라서지금 저들 꼴을 보라고…….” 누더기를 걸친 채수염은 얼크러지고 밑 빠진 모자 밖으로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더러운 꼴을 한 거지는빗물을 줄줄 흘리고 덜덜 떨면서 갈고리처럼 굽은 그의 지팡이 끝으로 두 사람의 시체를 가리키며 선언했다. “죽음 앞에서는 우리 모두 평등하다고.” / 265p

 

 

잔느는 순간순간 되뇌는 것이었다. “나는 평생 운이 없었어.” 그러면 로잘리가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다면품팔이를 하러 가려고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했다면 어쩔 뻔했어요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그런 사람들은 너무 늙어 일을 못 하면비참하게 죽는답니다.”

잔느는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아들에게 버림받아혼자뿐이라는 걸 좀 생각해 봐.” 그러자 로잘리가 무섭게 화를 내며 말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요생각해 보세요군대에 간 자식들도 있고미국에 가서 사는 자식들도 있어요.” / 338p

 

 

 




 

 

 

 

  『여자의 일생』 이 한 편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이유는 다양한 계절을 넘나드는 노르망디의 풍경과 소설의 운명이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찬란한 초록빛 자연 속에서 생동하는 잔느와 음울한 잿빛 전원에서 자신의 운명을 비감하는 잔느의 대비는 모파상의 서정적인 문체와 한 몸을 이룬다때문에 소설의 전반에 흐르는 생의 허무와 고독비애는 또 다시 무심코 꽃망울을 터뜨리는 계절이 찾아올 때쯤이면 얼마간의 희망을 기약하게 하며 우리를 계속에서 삶의 길로 이끈다그렇게 소설은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라는’ 생의 담담한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읽어도 좋았다읽는 내내 우울한 마음이 떠나질 않았지만 언젠가 다시 읽어도 또 좋을 것 같다그나저나 모파상당신은 왜 여자의 마음을 여자보다도 잘 아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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