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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한국어 ㅣ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평점 :

천진난만함이 언어의 무게를 배반하는 순간, 유머가 발생한다!
그래서, 고급 한국어는 언제 내주실 건데요?
얼마 전 김경일 인지심리학 교수의 강연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복합감정문화라는 특수성을 지닌 이들이라 진단한다. 일례로 한 외국인 교수가 그에게 “섭섭하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사전에 따르면 이를 sorry 혹은 disappointed로 정의하는데, 사실 이건 애석하다고 표현하기도 마땅치 않고, 실망스럽다고 표현하기에는 어쩐지 과하며 친밀한 관계 속에서 상대가 나의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해서 못내 아쉽고 서운한…… 그러니까 한국인인 우리로서도 이 미묘한 뜻까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말이다. 외국인 교수는 결국 난해한 표정으로 그렇게 돌아갔고, 이후 시간이 흘러 다시 김경일 교수를 만났을 땐 이번에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또 한번 물었다고 한다. “섭섭하다까진 어떻게든 이해하겠는데, 그럼 이건 뭐야. 시원섭섭하다?” 하, 이거 참.
그러고 보니 『중급 한국어』 속에서 글쓰기 강의를 맡은 지혁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생명과 인생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한글 단어 ‘삶’을 보면 흥미로운 자음들이 보입니다. ㅅ, ㄹ, ㅁ인데요. 미국에서 한국어 수업 시간에 이 단어를 처음 알려 주었을 때 학생들이 보였던 반응이 생겨납니다. 간단한 단어에 뭐가 이렇게 많이 들어 있냐는 거였죠.” 우리가 이렇게나 복잡하고 예민하고 복합적인 정보를 지닌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었다니, 그러니 이 ‘삶’이 고단할 수밖에. 섭섭하다 못해 시원섭섭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이 땅덩어리에서 말이다. 그래서 또 다시 감탄하게 되는 것은, 그 수많은 값을 지닌 언어를 찾고 고르고 골라 지우고 복원하기를 반복하며 오랜 부침 끝에 한 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들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섬세한 인간들인가 하는 점이다. 돈 텔, 벗 쇼. 좋은 글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하지 않음으로써 말하지 않고 보여줘야 하는 것이기에, 좋은 글을 쓰고야 말겠다는 그 끝없는 분투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는 계속해서 책을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 제가 너무 복잡하게 말했나요. 이 책, 당신의 글이 참 좋다고 말하려고 하다 보니 길어졌네요.
중요한 건 이 글을 쓰고 있는 작가, 즉 현재의 조이스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문제일 거예요. 어린 소년을 화자로 선택해서 조이스가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은 단순한 기억의 나열이 아닙니다. 사실 관계의 확인도 아니죠.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알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통찰, 깨달음, 더 나아가서는 내 과거에 대한 해석과 논평일 겁니다. 커넥팅 더 닷츠. 인생이란 점을 선으로 잇는 과정이라고 하잖아요?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점과 점을 잇는 선. 선을 그리는 것. 그 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내는 것.
…… 여러분의 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요? / 62p
『중급 한국어』는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시간강사이자 소설 작가인 ‘문지혁’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지혁이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의 글쓰기 능력의 향상을 위해 다양한 종류의 텍스트를 해독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글을 써봄으로써 한 권의 책을 완성해가는 수업의 커리큘럼에 따라 진행된다. 강의의 첫 번째 시간에서는, 어떤 글이든 우리가 쓰는 글은 일종의 수정된 자서전이라는 점에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탐독해보기로 한다. 이는 작가와 소설 속 주인공이 동명인 것처럼, 소설 『중급 한국어』가 본질적으로 작가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독자에게 일러주는 신호가 된다. 실제 ‘글쓰기의 과정과 기술’, ‘유년’, ‘사랑’, ‘대화’, ‘일상’ 등에 이르기까지 글쓰기 강의 속 커리큘럼들이 지혁의 삶 곳곳에서 긴밀하게 연결되는데, 이는 마치 글쓰기의 실전편 같은 인상을 준다.
소설이라는 실험실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과 허락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요? 소설의 인물들은 옳고 바르고 정의로운 인간이 아니라, 실패하고 어긋나고 부서진 인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애초에 소설이란 윤리로 비윤리를 심판하는 재판정이 아니라, 비윤리를 통해 윤리를 비춰 보는 거울이자 그 둘이 싸우고 경쟁하는 경기장이 아닐까요? / 93p
이건 카프카 생전에 발표되었던 「변신」의 표지입니다. 이 작품이 출간될 때 카프카는 출판사에 한 가지 부탁을 했다고 해요. 절대로 벌레의 모습이 보여서는 안 된다고. 여기서도 그렇죠? 남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있고(이미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죠.) 반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것은 어둠뿐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보이는 것은 무섭지 않습니다. 정말로 무서운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죠. (…) 진정한 공포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텅 빈 공간에서 비롯됩니다.
아, 한 가지 빼먹었네요.
백색의 종이……. / 132p



지혁은 학생들에게 글쓰기란 일종의 여행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은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갔다가 반원을 그리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마치 여행을 하듯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했다가, 처음 떠났던 원래의 자리로 귀환하는 구조다. 하지만 정확하게 떠났던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도착 지점에서 미세한 변화가 일어난다. 오랫동안 여행을 다녀온 우리가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돌아온 A는 무엇이 될까. B? C? 아니면 그대로 A? 지혁은 만약 A가 제대로 된 여행을 다녀왔다면 아마 A는 A′가 있을 거라고 말한다. 작지만 분명한 변화를 겪게 되는 것, 글쓰기는 바로 이러한 과정이면서 동시에 이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렇듯 의심한다. 어째서 내 삶은 A′는커녕 A-밖에 될 수 없냐고. 혹은 지혁이 스스로를 애매한 사람이라 정의한 것처럼, A와 A′ 그리고 A-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애매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거냐고. 고전적인 소설 창작론의 관념으로부터 배반된 삶, 그 안에 깃든 아이러니. 쓰기 전의 나와 쓴 다음의 나는 결코 같지 않다는데, 정말 그럴까 하는 자문. 그렇게 관념은 관념으로만 남아 기망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 무렵, 소설은 뜻밖에도 지혁의 딸 은채의 천진난만함을 통해 그곳으로부터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정형화된 언어 너머에 존재했던 ‘~’들, 지금은 오래되고 익숙한 자장가 「섬집 아기」를 향한 애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3개월간 주구장창 들어야 할지 모를 BTS의 「다이너마이트」 에나 마음 단단히 먹을 때라고. 알고 보면 ‘관념의 밖’ 그 어디에서 진짜 나의 이야기가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소설은 가장 미숙하지만 순수한 은채를 통해 보여준다.
쓰기 전의 나와 쓴 다음의 나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말했잖아요?
우리는 A에서 A′가 되었으니까요. / 47p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글쓰기도 결국은 반복입니다. 반복에서 중요한 것은 되풀이 그 자체예요. 때로 우리는 희망에 도취해 반복을 벗어나거나, 절망에 빠져 되풀이를 그만두곤 합니다. 하지만 인생이 언제 그렇던가요? 오늘이 좋았다고 해서 내일이 찾아오지 않거나, 어제가 최악이었다고 해서 오늘 역시 그대로 끝나 버리지는 않죠. 어떤 날을 보냈든 내일은 또 찾아오고, 기어코 태양은 다시 떠오릅니다. 적어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요. 그러니 희망을 붙들지 말고 절망에 물들지 마세요. 그냥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냥 살듯이. / 166p



천진난만함이 언어의 무게를 배반하는 순간, 그때 풉 하고 터져 나오는 유머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소설이다. 자가 격리로 인해 줌 강의를 하던 도중 은채가 우는 바람에 잠시 강의가 중단되자, 갑자기 모니터에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스무 개의 얼굴과, 그들의 다정한 목소리와, 동아줄처럼 위로 줄지어 올라가던 작고 귀여운 이모티콘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광경을 독자에게 선물하는 이 작가의 글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고급 한국어는 언제 내주실 건데요? (고급이라니, 어쩐지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