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걸 크러시 - '남성' 말고 '여성'으로 보는 조선 시대의 문학과 역사
임치균 외 지음 / 민음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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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여성들그들에게도 목소리가 있었다!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준 조선의 여성들!

 

 

 

 

여자는 죄인이다.

모든 일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남성들에게 조정받게 되므로,

남자가 되지 못한다면 인륜을 그침이 옳을 것이다.” - 방한림전

 

 

 

  조선 시대는 우리 역사상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가장 심했던 때였다그녀들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라야 했고 혼인을 한 뒤에는 남편을 따라야 했으며 늙어서는 아들을 따라야 했다그녀들을 둘러싼 모든 환경에 제약이 잇따랐지만남성들은 물론 여성들 자신들조차도 그 억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억압이 억압인지를 인식하지 못했다방한림전의 주인공 영혜빙은 모든 일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므로 여자는 죄인이다!”고 탄식했다그런데 19세기를 지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주체적인 여성 의식이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다일상화되어 버린 사회적 질서를 비롯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순응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고민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로 태어나지 못해 불행하구나!

 

 

  『조선의 걸 크러시는 억압된 환경 속에서 요조숙녀와 현모양처라는 정체성을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 조선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실존 인물인 여성역사적으로 실재했다고 알려진 여성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캐릭터로 만들어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아 엮었다. 1부에서는 복수를 실천한 여성들의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진다안석경의 십교만록」 속에는 부모의 원수를 죽이기 위해 양반이었던 아가씨가 검객이 되어 복수를 실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하지만 여성의 몸으로 몰락한 집안을 이을 수 없고남성의 삶을 산 자신을 받아들일 곳도 없음을 자각하며 자결을 택하는 모습은 씁쓸함을 남긴다그럼에도 죽음으로 조선의 규범에 항거하는 모습은 당시 조선의 여성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으리라.

 

 

 

  특히 성적 욕망에 진솔하고 성관계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한 여성의 이야기가 퍽 흥미롭다그녀는 남편의 성관계 거부로 소박을 맞은 데에 대한 부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관에 이혼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한다조선 시대에 이혼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지만부부 사이에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체적으로 행사하는 당당함을 보여준 이 여성의 이야기는 조선 시대 여성을 대표했던 현모양처 캐릭터의 진실과 실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반면모함을 당해 음탕한 여자로 소문이 난 은애가 원수를 죽여 결백을 주장한 이야기는 조선 시대 판 가짜뉴스를 떠올리게 한다우리 사회가 여전히 사실보다는 흥미를 앞세우며 익명성 뒤에 숨어 매일매일 또 다른 억울한 은애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이를 경고하는 책 속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고민을 남긴다.

 

 

 

신태영이 상대했던 대상은 남편 한 사람이 아니었다당시의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의 시선을 따라가는 남성 사회가 집단으로 신태영에게 억압적 폭력을 가한 것이다이러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핍박받어라도 집을 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인식이 확고했다대부분 남성에게 지지받았던 유정기는 끝까지 신태영과 이혼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신태영 역시 부당한 이혼 요구에 끝가지 저항했다. / 44p

 

 

간음에 관련된 다툼에서는 한번 지목되면 여러 사람이 따라서 사실로 여기게 된다. “도둑의 누명은 끝내 벗을 수 있으나 간음에 대한 모함은 씻기 어렵다.”라고 한 속담은 바로 이를 일컬은 것이다만일 실제 음란한 행실이 있었다면 움츠러드는 것이 당연한 이치니이처럼 통쾌하게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 정약용흠흠신서』 / 54p

 

 

 



 

 

 

 

  2부 영웅의 기상’ 편에서는 조선 시대 여성 경찰 다모를 비롯해 남장을 하고 입신양명의 길을 선택한 여성고전소설 속 여성 영웅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헌신한 여성들이 등장한다그 중에서도 여성 영웅 소설의 등장이 신비롭다사실 조선 시대 여성들이 가문의 보호 없이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가문의 몰락 또는 전쟁과 같은 국란억지 혼인 등으로 인해 위기를 맞았을 때 여성들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남장하거나 자결하는 것이었다이를 반영하듯 여성 영웅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위험이 닥쳤을 때 남장을 하고 위기에 대처하거나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에서 벗어나 외적으로 강한 남성에게 견줄 만한 용맹한 능력을 보여 준다. ‘여자로 태어났다고 규방 깊숙이 들러 앉아 여자의 길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인가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세상에 이름을 날릴 것일랑 단념하고 분수대로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보이지 않는 장벽이자 깨뜨릴 수 없었던 유리 천장을 깬 여성 영웅들의 모습은 조선 시대 여성들이 그토록 바랐던 판타지가 아니었을까.

 

 

 

조선 시대 여성 영웅 소설은 유교적 삶에 순종했던 여성이 자기 능력을 펼치고 주체적 삶을 찾는 성장 과정을 그려 나간다그리고 여성의 주체적 삶이 유교적 이념을 존중하는 삶과 균형을 이루었기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이처럼 정수정은 19세기 한복판에서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그려 낸다여성들에게 보이지 않는 장벽이자 깨뜨릴 수 없었던 유리 천장을 깬 여성이것에 고전소설 속 정수정을 불러낸 이유다. / 102p

 

 

부랑이 여자였다는 사실도 놀랍지만주변 반응 역시 우리가 알던 조선의 남성적 시선이 아니었다모든 비장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칭찬해 마지않았다부랑은 정춘신의 도움으로 가족들을 모두 병영으로 이사시킨 후 함께 지내게 되었다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부랑이 여자임이 밝혀졌는데도 그녀에게 부여되었던 사회적 역할은 계속 유지되었다는 점이다조선 시대에는 여자가 병영에서 공무를 부여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그런데도 부랑은 끊임없이 정춘신을 보좌했고그 역할을 정묘호란 현장에서도 계속되었다. / 118p

 

 

 

  이 외에도 규방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시와 노래를 지음으로써 조선의 여성에게 강요되었던 덕목과 도리에 저항했던 이들이 등장한다그들은 시와 노래 속에 당대 여성들이 꿈꾸던 욕구와 소망을 마음껏 펼쳤다이는 자신의 현실을 아름다운 언어로 바꾸어 자기 삶의 가치를 스스로 높였다는 점에서 무척 특별하다여기에 자신이 직접 남편을 고르겠다고 선언한 해당향의 주인공 양백화조선판 콜럼버스 사부인여성이라는 운명에 항거해 자아를 실현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까지 넉넉하게 멋쟁이로 살았던 만덕의 이야기는운명에 순응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갔던 여성들의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어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빙허각은 폭넓은 독서 경험을 통해 축적한 지식을 다른 여성들과 공유하고여성뿐만 아니라 관련 정보가 필요한 이들에게 실용적인 방법을 알려 주고자 했다그렇기에 규합총서는 단순한 요리책이 아니라 조선 후기 생활문화 전반을 다룬 가치 있는 자료로 남을 수 있었다이 책은 빙허각이 살아 있을 때 친척들이 자주 베껴가면서 세상에 알려졌고그녀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 인기를 끌었다그리고 20세기 초까지 여성들에게 널리 읽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206p

 

 

약 560년 전에 만들어졌던아름답지만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다하지만 우리가 오늘 이 사랑 이야기를 소환한 이유는 비극적 사랑이 남겨 놓은 여운이 아니다윤리적·도덕적 경계를 허물고 스스로 반려자를 선택해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이어 갔던 아름답고 매력적인 15세기 여성 최랑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최랑의 모습은 가부장제에 포섭당하지 않았던 여성다움의 실체는 아니었을까? / 247p

 

 

 




 

 

 

 

  『조선의 걸 크러시는 조선 시대 여성들의 삶과 서사를 담은 특별한 책이다우리의 뇌리에 깊이 박힌 조선 시대 여성들의 삶에 대한 지평을 넓혀준 책이기도 하다유교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준 이들의 이야기가 어째서 많이 주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아쉽다보다 다양한 영역에서 이들의 정신과 분투가 조명되고 재생산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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