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뷰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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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지 않지만 이 묵직함이 좋다!

스파이 소설의 대가가 쓴 유작이자 전직 요원 출신이 쓴 굉장히 사실적인 느낌의 스파이 소설!

 

 

 

  마감을 앞둔 시각챙이 넓은 홈부르크 모자를 쓴 60대 사내가 서점 안으로 들어선다잘 나가는 증권 중개인이었던 줄리언이 런던에서의 화려한 도시 생활을 접고 작은 해변 마을에 서점을 연 지 두 달쯤 된 어느 날이었다목소리가 중후한억양에서는 살짝 이국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은발의 사내는 줄리언에게 호감을 드러내며 서점 이곳저곳에 관심을 보인다그는 자신의 이름을 에드워드 에이번이라 소개한 뒤 지금은 은퇴한 영국이 남긴 잡동사니’ 쯤으로 해두자는 엉뚱한 말을 남긴 뒤 사라진다그저 참견하기 좋아하는 동네 노인이겠거니 했던 줄리언은 다음 날 다시 그와 만난 자리에서 돌아가신 부친과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친이 곤경에 처했을 때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는 그의 선의에 마음이 움직였던 걸까실버뷰라 불리는 집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돌보고 있다는 그의 처지가 신경 쓰였던 걸까줄리언은 비어있는 서점 지하에 대중을 위한 문화 공화국을 마련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에드워드의 의견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알게 모르게 그를 의지하게 된다그러던 어느 날런던으로 가서 한 여성에게 자신의 편지를 전해달라는 은밀한 부탁을 받는다.

 

 

 

벨사이즈파크 지하역 맞은편의 에브리맨 극장.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 한 권으로 신분을 확인할 것.

제발트를 보고 접근하면 자연스레 편지를 건네주고 나올 것.

 

 

 

  아내 몰래 관계를 유지했던 여성에게 편지를 전해주라니죽어가는 아내를 두고 이게 웬 터무니없는 일인가 싶으면서도 줄리언은 에드워드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런던으로 향한다하지만 이날을 계기로 자신도 모르게 에드워드의 비밀스러운 일에 가담하게 된 줄리언은 국가안보 수장이자 스파이캐처 팀장인 스튜어트 프록터의 주시를 받게 된다이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줄리언은 에드워드의 가족과도 가까워지고한편에서는 스튜어트가 에드워드의 과거를 비롯해 그를 둘러싼 모든 인물과 접촉하며 포위망을 좁혀 온다플로리안테디에드바르… 이름도직업도 분명치 않은 에드워드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어째서 국가안보 수장인 스튜어트가 에드워드를 쫓는 것일까그렇게 소설은 온통 의문투성이인 남자 에드워드를 둘러싼 비밀에 서서히 다가가고마침내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에드워드의 기분이 요동칠 때마다 목소리도 들쑥날쑥했다낭랑했다가 가벼웠다가 때로는 소위 신사 계급의 전통적인 억양까지 오락가락했다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진짜 모습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저런 억양은 어디에서 배운 걸까저렇게 말할 때는 누굴 흉내 내는 거지물론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지금 고통받는 사람에게 도움과 위로를 제공하는 중이 아니던가그가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듯이 도시에서 온 청년이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얘기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보답으로 에드워드 또한 줄리언에게 무료로 전문적 조언과 가르침을 전해주었다더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 100p

 

 

에드워드는 홈부르크모자 아래 은발을 휘날리며 다시 한번 폭풍우 속으로 떠나버렸다줄리언은 카운터로 향했다.

오믈렛이 맛이 없었나 봐요.”

정말 최고였습니다양이 많았을 뿐이죠그런데 죄송하지만 두 분이 조금 전 어느 나라 말로 대화를 하셨죠?”

에드바르하고?”

에드바르.”

폴란드어예요에드바르착한 폴란드인몰랐나요?” / 39p

 

 

 



 

 

 

 

  『실버뷰는 영국 첩보원 출신이자 스파이 소설의 대가인 존 르 카레의 유작이다첫 장편소설 죽은 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비롯해 이어지는 여러 편의 소설에서 주로 동서 냉전기를 배경으로 한 스파이의 활약상과 그들의 내밀한 세계를 담았던 작가는 이번 마지막 작품에서도 스파이들을 주인공으로 한다한때는 학자였지만 지금은 죽어가는 아내를 돌보는 평범한 노인인 줄 알았던 남자가 실은 전직 요원 출신이었던 사실이 밝혀지며 그가 지닌 비밀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다만 이 소설은 거대한 사건을 둘러싼 스파이의 활약상이나 스릴러 같은 전형적인 스파이 소설과는 다소 결이 다른 듯하다냉전 직후 일관된 외교정책이 부재한 상태에서 스파이 조직은 정당성을 위협받고 내부에서는 잦은 와해와 알력 다툼이 빚어진다한편에서는 조직과 조국을 향한 충성심만으로 늘 감시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요원으로서의 삶에 회한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이렇듯 소설은 우리가 이제껏 그려왔던 스파이가 아닌비밀과 배신 그리고 음모에 노출되어 있는 삶과 자유롭게 살며 사랑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삶 사이에서 고뇌하는 스파이들의 이중성에 주목한다.

 

 

 

  무엇보다 나는 이 소설이 스파이를 둔 가족의 이야기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평생을 비밀 속에서 살아야했던 부모를 둔 자녀는 부모가 죽어서도 마음대로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훈장 하나 걸지 못하는 처지에 마냥 슬퍼할 수밖에 없다집에 도청 장치가 없는지 늘 신경을 써야 하고부모가 서로 제대로 된 진실을 단 한번이라도 나눈 적이 있을지 의심스럽다설령 가족일지라도 스파이들의 세계는 서로 공유하는 비밀이 아니라서로 감추는 비밀이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줄리언의 말에서우리는 그 어느 소설에서도 본 적이 없는 가장 현실적인 스파이 소설을 만날 수 있다.

 

 

 

지금도 지역 분과위원회가 두어 개 있네구소련 러시아가 하나를 운영하지예전엔 동남아시아가 있었지어느 시점까지는 중동도 계속 돌렸어.”

어느 시점?”

부시-블레어 시대그땐 최고였지그러다가 미국 대통령이 순한 맛으로 변한 다음부터 지지부진해졌네.” / 83p

 

 

아빠 말이 엄마가 무덤에 오지 말라고 했대내가 그랬어아빠가 안 가면 나도 안 갈 거야줄리언도대체 두 사람이 왜 저렇게 된 걸까? / 226p

 

 

다들 짐작하는 대로라네부국장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중동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미국의 결단자기들이 벌인 전쟁의 결과를 마무리하기 위해 또 다른 전쟁을 벌이는 미국의 습관냉전의 유물로서의 나토와 그 폐해배짱도 지휘관도 없이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영국영국은 위대함을 꿈꾸지만 그건 달리 어떤 꿈을 꾸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묘사했더군.” / 250p

 

 

 




 

 

 

 

  사실 장르 소설임을 감안하면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암호화된 듯 난해한 대화스파이 조직 내부에서 사용할 법한 표현은 몇 번이고 되짚어 읽게 된다보스니아 전쟁을 비롯한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하지만 스파이 소설의 대가가 쓴 유작이자 전직 요원 출신이 쓴 굉장히 사실적인 느낌의 스파이 소설로비슷한 소설에서 느낄 수 없었던 긴 여운과 남다른 감흥을 준다그리고 계속해서 그의 전작들을 거슬러 올라가고픈 욕심이 생긴다존 르 카레의 작품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지금이라도 존 르 카레의 작품을 알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소설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여담이지만에드워드가 추천한 토성의 고리가 자꾸 생각날 것 같다얼른 읽어봐야겠다.

 

 

 

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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