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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다를 닮아서 ㅣ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반수연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평점 :

산다는 것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리는 빗속에서도 춤추는 일이다!
어둡고 질척했던 유년의 풍경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뼘쯤은 더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반짝이는 기억들 그리고 또 다른 생을 완성시키는 이국의 시간들!
어쩌면 이민자들의 삶이란, 떠나온 것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떨어져나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고향과 이국의 시간이 부딪히는 마찰음을 견뎌내야 하는 지난한 과정 속에 존재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정착에의 희망과 배척이라는 현실의 틈에서 온전히 머무르지 못하는 그들의 처지가 바다와 얼마쯤 닮은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통영에서 나고 자란 뒤 캐나다의 해안 도시 밴쿠버로 이민을 간 저자의 이야기에서 이민자들의 애환을 엿본다. 하지만 “산다는 것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리는 빗속에서도 춤추는 일이다.”던 책 속의 글귀처럼, 부딪쳐도 부서지진 않을 거라는 믿음을 따라 회복가능한 것에 괴로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그네들을 어루만져보기도 한다. 덕분에 ‘나는 바다를 닮았다’는 건, 실은 행복한 노마드적 삶을 살고픈 저자의 바람이 담긴 말일지도 모르겠다고 긍정하게 된다.
멀리 떠날 것. 그리고 돌아올 것.
힘껏 돌아올 것.
그것은 오래되고 익숙한 리셋의 방식이었다. / 163p
“거긴 통나무집이 많으니까 일자리도 많을 거야.”
그것은 이민을 오기 전에 품었던 무수한 오해와 편견과 근거 없는 희망의 일부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주자로, 소수자로, 주변인으로 정착은 기대 이상으로 고달팠고, 동양인 이민자를 향한 차별과 모멸 속에서 마음에도 없는 땡큐와 쏘리를 남발하며 늘 자신을 낮추어야만 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덜 쉬고 눈에 띄지 않게 존재하되 필요할 땐 늘 거기 있어야 겨우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게 이방인이 살아남는 방식임을 알게 된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어의 한계 때문에 어중간한 이해와 오해의 상태에 익숙해지는 것이 영어에 능숙해지는 것보다 쉬울 때도 있어서 그냥저냥 손해를 감수하는 편리함을 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나오는 언어라는 게 있어서 마냥 휘청거리지만은 않을 수 있다. 일 년에 한 번도 제대로 된 눈이 내리지 않는 통영에서 운전을 배운 탓에 벤쿠버의 눈 앞에서 쩔쩔매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눈에 덮인 내리막길에서 차가 핸들의 방향대로 움직이지 않아 저절로 미끄러지기 시작했고 이대로라면 남편의 차를 박을지도 모를 아찔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브레이크를 밟으면 드라이브 웨이 중간에 차를 세워둘 수 있었지만 학교에 등교해야 할 아이가 걱정이었다. 마침 옆집 중동 남자의 아이가 아들과 같은 학교여서 가는 길에 데려다주겠다 했다. 평소에 한마디도 해본 적 없는 남자에게 아이를 맡기다니, 불안이 많은 성격을 생각하면 너무도 이례적인 날이었다.
그렇게 아이를 보내고 나니 이번에는 지나가던 트럭 한 대가 앞에 서더니 초라해 보이는 외모의 한 백인 남자가 도와주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어머어마한 할부금을 안고 산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새 차인데 그가 타고 달아나면 어떡하지, 돈을 요구하면 어쩌나, 고민하던 것도 잠시 남자는 친절하게도 삽으로 눈을 치워주기까지 했다. 민망하게도 그는 그녀가 주섬주섬 내미는 20달러를 거절하며 삽을 선물로 주었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뒷마당에 보관하고 있는 삽은 모든 게 낯설었을 이국에서 처음으로 선명하게 느낀 선의였을 것이다. 가슴으로 쓴 선의라는 언어 덕분에 그녀는 이곳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살아갈 마음을 얻고, 타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용기를 배울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눈이 오는 날이면 괜스레 남자의 쇠삽으로 마당의 눈을 밀어보곤 한다. 그 남자는 내게 왜 그랬을까. 나의 논리로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선의와 여태도 터무니없이 선명한 나의 두려움이 떠오른다.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쩜 논리가 아니라 용기일지도 몰라. 선의는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니 가슴으로 느끼는 게 맞을지도 몰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 31p
도둑맞은 물건보다 도둑맞은 친절이 더 억울하다던 그녀가 아들에게 배운 영어 욕을 제대로 써봤는지는 모르겠다.
부디 이 땅의 이민자들이 마음에도 없는 땡큐와 쏘리를 더 이상 남발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 45p


모두가 모두를 안다고 생각할 만큼 노출과 관음이 일상적이었던 통영의 유년시절. 과일집도, 채소집도, 대장간도, 참기름집도, 난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도 선술집 과부와 과부의 자식들은 막 대해도 좋은 상대라 여겼던 동네 사람들. 토사물과 똥오줌이 나뒹구는 곳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규정지어진 내 팔자를 참을 수 없어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노라 저자는 고백한다. 하지만 오랜만에 들른 고향은 거리도 바다도 카페도 모두 관광객의 차지가 되어버렸고, 낯설다 못해 그 속에서 길을 잃어야했다. 고향이 낯설어지길 바랐지만, 그토록 떠나고 싶었지만 실제로 그런 날이 오자 어찌된 일인지 거절당한 사람처럼 당황스러워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죽음이 바짝 다가온 순간에도 영영 애비 없는 삶을 살게 될 아홉 살 딸을 위해 붕어빵에 하얀 설탕을 뿌려주셨던 아버지의 마음 같은 게 고향이 아닐까. 몸에 좋을 것 하나 없어 보이지만 이따금 선물처럼 다정했던 달달함이, 어둡고 질척했던 유년의 풍경을 한 뼘쯤은 더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반짝이는 기억들이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면 우리는 늘 그렇듯 고향을 떠올리게 되니 말이다.
우리는 동네 골목골목에 발자국을 새기듯 천천히 걸었다. 대학 졸업 후 줄곧 고향에서 살고 있는 친구는 오랫동안 자신에게 위안이 되었던 그 마을이 이방인의 거리가 되어가고 있다고 속상해했고, 나는 오래 이방인이 되어 살았던 바다 건너의 삶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내게 너무 익숙해진 이국의 시간과 손님처럼 어색한 고향이 시간이 서걱거리며 부딪혔다. / 90p
저자에게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는 내가 뭘 못하는 게 그리 힘들지 않아. 그래서 못해도 재밌어. 그런데 못하는 걸 잘 못 견디는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잘해도 시도하고 싶어하지 않더라.” 좀 모자라거나 벙어리일지도 모른다는 수군거림을 듣고, 척추측만증 때문에 열 시간이 넘게 걸리는 수술을 두 차례 한 아이다. 엄마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을 보는 게 내내 두렵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고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쉽게 절망하지 않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나보다.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다보면 사소한 것이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게 된다는 것을 배운 아이에게서 엄마는 도리어 위안을 얻는다. 덕분에 잘 해서 재미있는 게 아니라 못해도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그 귀한 마음을 나 또한 배우게 된다.
“그러니 회복 가능한 것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
나는 딸에게 말했다. 그건 내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내일쯤은 생과 사의 거대한 담론은 잊어버리고 또 사소한 것들로 스스로를 들들 볶아대겠지만. / 156p



역마살이 끼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어딘가로 가고 싶어 안달이 날 때면 스스로에게 환기가 필요한 시점임을 직감한다. 단, 멀리 떠나되 돌아올 것. 아니 힘껏 돌아올 것을 약속하는 그녀에게서 다시 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법을 배운다. 또한 그것이 생을 인정하는 방법임을 배운다. 한 번씩 마음이 고달파지는 날에는 그녀의 약속에 내 마음도 걸어봐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