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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스토리 - 박혜진 비평집
박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가장 예민한 촉수로 문학의 가장자리까지 보듬어가며 있는 힘껏 끌어안는 존재!
언더스토리에서 페가수스의 별자리까지, 덕분에 문학의 드넓은 지대를 사유하는 일은 참 즐겁다!
비평가란 가장 예민한 촉수로 문학의 가장자리까지 보듬어가며 있는 힘껏 끌어안는 존재가 아닐까. 문장의 숨결 하나하나, 시공간을 유영하는 서사 하나하나까지 더듬어 만지며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영원성을 부여하는 문학의 자리 곳곳에 이들이 있다. 박혜진 비평가는 적은 빛으로도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 즉 그늘에서 견뎌내야만 하는 하층식물(언더스토리)에게서 가장 문학적인 것을 발견한다. 그늘을 견디기 위해 곰팡이를 매개로 소통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이들처럼, 절실하고 애틋한 심층의 연결에서 이야기가 탄생하고 이야기는 우리에게 영향과 영양을 준다고 말하는 그녀의 시선은 그래서 따듯하다.
공생 관계로 살아가는 이 땅의 홀로바이온트들을 위하여
급진적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독립적인 개체가 아닌 ‘홀로바이온트’다.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는 복합적인 유기체로서 문학은 ‘공생 관계로 살아가는 생명체의 존재를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홀로바이온트라는 개념에서 들여다보자면 한강이 그려내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은 이미 그렇게 존재했다. 박혜진 비평가는 ‘식물과 식물을 연결해 주는 균사 네트워크가 있는 것처럼 인간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걸 한강의 소설은 믿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속에서 그려진 제주 4.3 항쟁이라는 거대한 역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에게는 낯설고 생소한 고통일 뿐이지만, 그 이름 없는 고통들을 내 쪽으로 바짝 옮겨 와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넘치는 고통을 내 쪽으로 받아 삼키는 결합이며 싸워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가짐으로써 없애는 극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공생 관계로 살아가는 이 땅의 홀로바이온트들을 위한, 연결자로서의 문학에게 우리는 참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무의식은 실패의 언어다. 그리고 실패의 언어로 문학은 쓴다. 이때 문학의 무의식은 개인의 무의식이 아니다. 계급적?사회적?문화적, 이른바 공동체의 무의식이다. 문학을 통해 우리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숨겨진 것, 찾아야 하는 것이 개인의 그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문학에 있어 ‘나’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사회적, 젠더적, 문화적 주체로서의 ‘나’인 것이다. 그에 기반한 공동체의 무의식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경험한 적 없는 과거를 재발견하게 한다. 모든 문학의 형식과 내용은 정치적 무의식이라 불리는 것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으며 모든 문학은 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성찰로 읽혀야 한다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결론이 내게는 문학과 문학을 발견하는 비평의 출발인 셈이다. 문학사는 무의식의 역사다. / 12p
언더스토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시작과 끝은 탄생과 죽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끔찍한 학살로 비참하게 죽었거나 실종되어 죽음조차 완료되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더 이상 인간 아닌” 존재이지만 “아직 인간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들의 인간이거나 인간이지 않은 존재는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인선과 경하에게 연결되어 두 사람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채 서로 연결되는 존재인 나무를 심는 행위는 묘지처럼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는 행위이기만 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죽음과 살아 있는 이들의 목숨을 연결시킴으로써 계속되고 있는 시간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한다.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이들과 연결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역사적 인간이고 역사 속 인간이다.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비평 중에서 35p


박혜진 비평가는 올가 토카르추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속의 두셰이코라는 인물에게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신념임을 자각한다. 알아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에 행동하는 사람. 우리 시대는 지식이 아니라 감정이 더 필요한 시대임을 가까이 느낀다. 또한 자기 욕망의 화자가 됨으로써 극도로 황폐한 상태에 도달한 허연의 시를 들여다보며 그럼에도 이 잔인한 형벌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종류의 생명체와 구분되는 존재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편,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을 그린 김숨의 『L의 운동화』에서는 복원가로서의 예술, 다시 말해 무수하게 사라진 것들을 가까이 불러 모으는 문학에게서 사라짐이란 잃어버림의 동의어가 아님을 헤아려본다.
세계의 부조리함에 대한 간파는 모든 현대소설의 출발점이거나 종착점이다. / 이장욱,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비평 중에서 48p
‘현대’라는 이름의 종교가 있다면 ‘말씀’ 첫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자아를 구분하라. ‘분열의 관리’는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이 시대의 율법이다. 자아의 분열은 현대인의 병증을 거쳐 이제는 현대인을 정의하는 본질이 된 것만 같다. 분열은 현대의 난제이며, 그런 점에서 현대문학의 역사는 자아분열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 허연론 비평 중에서 61p
생의 모든 도면은 기억이라는 언어로 쓰인다. 기억을 뒤적이기 위해 우리는 대화에 나선다. 기억을 끌어내는 대화란 때로는 삼월의 눈처럼 조용히 내리지만 때로는 위험물을 감추고 있는 지뢰처럼 무섭게 폭발한다. 시간을 가로지르며 예측할 수 없게 오가는 그들의 대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일상적이고 이상적인 대화를 통해 소실되었던 과거가 복원되고 빛바래 멈춰 버린 추억이 재생된다. 여기 실린 다섯 편의 희곡은 개인에 있어, 또 역사에 있어, 잘려 나간 시간의 틈새를 메우는 한끗의 숨이다. 이 숨으로 인해 비어 있던 공간에 이야기가 시작된다. 접혀 있던 시간이 펴지고 잘려 나간 이야기가 돌아온다. 없는 줄 알았던 존재들을 환대하는 소박한 목소리의 세계. 본디 이것은 위대한 대화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배삼식이라는 위대한 문학의 본질이기도 할 것이다. / 배삼식론 중에서 118p
개인적으로 박혜진 비평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강혜빈의 소설 「밤의 팔레트」와 김금희의 소설 「너무 한낮의 연애」를 감각하는 지점이다. 그녀는 「밤의 팔레트」에서 섞임의 상태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한다. 꿰매는 것과 섞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꿰매는 것은 외부 요소에 의해 일시적으로 고정되는 상태에 지나지 않고 실밥을 풀면 고정된 상태는 금방 해체되고 말지만, 뒤섞인 물방울은 한번 결합하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섞임은 곧 새로운 상태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는 사랑은 두 사람이 한 개의 원을 채우는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박혜진 비평가는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의 도식에 따라 사랑의 총량의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사랑은 오히려 한 개의 원이 또 다른 원을 만들어 내는 증식의 연산임을 감각한다. 한 사람이 더 많이 채우면 다른 한 사람은 적게 채우는 식이 아니라 어떤 마음은 다른 마음과 붙어서 더 커지고 어떤 마음은 조그맣게 사라지는 것, 즉 수십 수백 개의 원을 만드는 사랑은 ‘차라리 비눗방울을 만드는 행위’와 같다고 말한다. 그렇게 사랑은 계속 비눗방울을 부는 것, 일시적인 꿰맴이 아니라 섞음으로써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나는 사랑의 자리에 문학을 끼워 넣어도 무방할 것 같다.
“훔쳐보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는 시/ 아무것도 훔쳐보고 싶지 않은 사람”. 이 글의 도입부에 배치한 유계영의 「시」 일부를 불러 본다. 아직 서른네 살밖에 안 먹은 화자가 다 죽은 사람처럼 미소를 잃고 아무것도 훔쳐보고 싶은 게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세상이 지루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너무 많은 것들을 보고 있어서 남몰래 보고 싶은 게 없어진 세상을 향한 목소리가 아닐까. 가장 훔쳐보고 싶은 것은 ‘나’이고 아직 다 보지 못한 것도 ‘나’이다. 내가 쪼개지면서 다른 나와 만나는 것은 인간의 가장자리를 증식하는 일이다. 가장자리가 많아질 때 세계와의 접점도 많아진다. / 유계영론 중에서 164p
완전한 끝은 탄생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끝과 끝이 만나 사라지는 소실점은 너머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새롭게 시작되는 점이다. 이편에서는 사라지는 소실점이지만 저편에서는 생겨나는 출발점이다. 인간 존재 자체에는 목적이 없다. 하지만 그러한 무목적성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 무관하게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목적이 없기 때문에 목적과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고 목적과 무관하게 평가받을 수 있다. 이유 없음은 허무가 아니라 자유의 근거다. 이것은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했던 말이다. / 양안다론 중에서 335p
현대의 폭력은 죽이지 않고 죽게 만든다. / 구병모, 『네 이웃의 식탁』 박민정, 『미스 플라이트』 비평 중에서 370p



페가수스에 대해 박혜진 비평가는 ‘메두사의 죽음에서 태어났고 번개라는 불길한 예언의 메신저로 일했으며 대체로 난폭하지만 때로는 길들여지기도 하는 존재. 언제나 누군가에게 속하지만 누구에게도 완전히 속하지는 않는 존재.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고립되어 있고 유연함 이면에 불안정을 숨기고 있는 하얀색의 우울, 우울의 전령’이라 정의한다. 나는 어쩌면 이 땅의 모든 문학가들이 그런 페가수스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번개는 옮겨지고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며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은 우리 정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겠지만 그들의 계속되는 날갯짓 덕분에 우리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안내된다. 다만 나는 그들의 고단한 날갯짓을 다 헤아릴 길이 없어서 비평가들의 언어를 빌려본다. 저 하늘의 별자리가 ‘페가수스’임을 명명해주는 그들이 있어 나는 좀 더 반짝이는 밤하늘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게 언더스토리에서 페가수스의 별자리까지, 박혜진 비평가가 열어 보여준 문학 세계 덕분에 보다 넓은 지대를 확보하는 되는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