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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혐오와 배제’, ‘공동체와 개인’의 문제가 빚어내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일면을 객관적이고 냉담한 시선으로 투사하는 김혜진 작가는 이렇게 또 한번 빛난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더없이 외로워진 현대인들에게 ‘경청’의 시간을 넌지시 제안하는 소설!
지난달 29일 밤, 이태원의 한 골목에서 156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벌어졌다. 사망자 대부분은 10대에서부터 30대에 이르는 젊은이들이었다. 사고 발생 이후 각종 언론에서는 ‘토끼 머리띠를 쓴 남성’을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참사 당시 “밀어!”라고 외쳐 압사 사고의 발단이 된 인물로 의심 받았던 남성이 토끼 머리띠를 썼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그로 의심 되는 남성과 인터뷰를 시도했고, 그는 방송을 통해 여전히 악의적인 메시지로 고통을 받고 있다며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미 압사 사고 발생 시간 보다 일찍 이태원을 빠져나와 지하철을 타고 있었고, 방송을 통해 교통카드 결제 내역과 경찰과 CCTV 확인까지 거친 상태였다. 하지만 모자이크를 하지 않은 영상이 공개되면서 얼굴과 신상이 공개되고 모욕적인 욕설을 일삼는 사람들의 거침없는 마녀사냥은 도를 넘어 위협적인 수준으로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특정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을 비유적으로 마녀사냥이라 지칭해왔다. 14세기에서 17세기 기독교를 절대화하여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어났던 이 잔인한 군중심리가 오늘날 인터넷과 매스컴, 익명성이라는 특성을 등에 업고 더욱 손쉽게 자행되고 있다. “누가 ~했다더라”에서부터 시작된 수군거림이 각종 루머와 악의적인 보도들로 이어지면서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집단 히스테리로 양산되고 마는 이 일련의 과정에 브레이크란 없다. 강경 대응, 고소 같은 완곡한 언어로 대응하거나 때로는 한 사람의 삶을 마감시키는 참극이 벌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누적된 피로감만 확인할 뿐이다. 소설 『경청』이 보여주는 현실 역시 그러하다. ‘세계의 부조리함에 대한 간파는 모든 현대소설의 출발점이거나 종착점(『언더스토리』, 박혜진)’이라는 설명을 굳이 곁들이지 않더라도, 전작 『딸에 대하여』, 『불과 나의 자서전』과 더불어 ‘혐오와 배제’, ‘공동체와 개인’의 문제가 빚어내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일면을 객관적이고 냉담한 시선으로 투사하는 김혜진 작가 특유의 의식이 이 작품에서도 도드라진다. 말 한마디에서 출발한 비극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당한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이야기는 침묵이 결여된 현대인들의 외로운 소통을 담아낸 우울한 초상이다.
침묵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들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상담사의 발언, 이대로 문제 없나.’
15년 차 심리상담사 임해수는 자신의 삶에서 기대한 수많은 것들, 꿈꿀 수 있었던 무수한 것들이 이런 식으로 전락할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삶이 신중하게 블록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다면 단 하나의 블록을 빼는 것만으로도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처절하게 실감하고 있을 뿐이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그 어떤 감정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까지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감 넘치는 조언까지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 오늘,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이전의 삶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 없이, 마치 다 아는 사람처럼, 대본에 적힌 대로 다른 패널들과 함께 한 배우의 잘못을 방송에서 논한 것이 그의 자살을 초래한 게 맞는 걸까. “혹시 임해수 박사님 아니에요? 맞죠?” 무시로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는 사람들, 신경 쓰지 마라고 위로하면서 당시의 일을 번번이 입에 올리는 이들, 사과를 했어야 한다는 은근한 비난이 섞인 시선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란 곧 고통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일이었기에 이제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악인인지, 용서받지 못한 가해자인지. 아니면 가혹한 누명을 뒤집어쓴 피해자인지 혹은 역경에 굴복한 패배자인지. 어쩌면 시련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린 얼간이일지도.
전 그런 사람들이 아니에요. 전 그럼 사람들과 달라요.
남들과 선을 긋는 말들. 다른 사람들을 멀리 내모는 말들. 결국 자신의 올바름과 정의로움을 도드라지게 하는 말들. 그러나 그녀에게 그 모든 말들은 차이가 없다. 사람들의 말은 그녀가 지나온 시간들을 상기시키니까. 여전히 모든 게 조금도 잊혀지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자신의 이름이 회자될 거라는 경고니까. / 15p
도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드는 걸까.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으면서 이렇게 날 조롱하는 데 혈안이 된 이유가 뭘까. 태도의 문제, 말투의 문제, 예의의 문제, 인격의 문제, 신뢰의 문제, 직업윤리의 문제. 나에게서 수많은 문제들을 예리하게 찾아낸 사람들이 보여 주는 게 고작 이런 거라니.
(…) 사과니 사죄니 하는 사람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내가 응해야 했다고 생각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그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 62p


해수는 오늘도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기자에게, 변호사에게, 친구에게, 헤어진 남편에게, 상담 센터 대표에게, 상담 센터의 상담자에게. 안부인지, 사과인지, 해명인지 모를 것들을 쓰고 찢어버리기를 반복한다. 언제나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열기엔 턱없이 부족한 글이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실은 그럴 마음도 별로 없는 글이고, 그러므로 폐기되어 마땅한 글이라고 자각하면서도 이따금 마음속 깊이 가라앉은 말들을 꺼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보류하기로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일 수 있다면 지금은 뭔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기를 택하기로 한다. 그렇게 피해자와 유가족, 진실과 억측, 호소와 반박 같은 깨진 유리 조각 같은 단어들 너머로 숨 쉬고, 걷고, 말하고, 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이들은 아니, 살아내야만 하는 이들은 대체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 이전에는 상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더듬거려본다.
그러나 더 두려운 말은 따로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들이 아니라 그녀가 기꺼이 삶을 공유한 이들이 간직한 말들. 그녀가 표정과 눈빛을 단번에 읽어 낼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 조심스러운 표정 뒤에 그들이 감추고 있는 의구심과 안타까움 같은 것들이 그녀를 괴롭힌다. / 67p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완벽하게 구분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자신이 집중해야 하는 일과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을 명확하게 구별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 삶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 106p
하지만 급진적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의 말처럼 ‘인간은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는 복합적인 유기체’로서 ‘삶의 과제를 함께 조정하고 공동의 삶을 공유’하기 마련인가 보다.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당한 듯했던 해수의 소외된 일상에 상처 입은 고양이 순무와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세이가 눈에 들어온다. 동정, 연민, 연약하고 가여운 동물에게 느끼는 흔한 감정 속에서 자기 연민을 엿보며 자신이 안타까워하는 것이 순무를 사로잡은 고통인지, 그런 고통에 노출된 삶인지, 고통을 견뎌 온 지금까지의 시간인지, 얼마가 될지 모르는 앞으로의 시간인지 알 수 없어진다. 대체 왜 자신이 이 고양이에게 마음이 쓰이는지, 구조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인지, 세이의 고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함으로써 계속 우정을 나누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지난날의 허상을 좇는 것과 다름없는 ‘의미 찾기 놀이’는 이제 그만두고 세이와 함께 순무를 구조하는 데 몰두한다.
그녀는 알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루맘이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를. 나아지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길고양이의 비통한 삶을 매일 마주하는 이유를. 그 안에서 마루맘이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를.
이유 같은 건 없어요.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고양이들도 뭐 이유가 있어서 사는 건 아니잖아요.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지. 저도 그래요.
마루맘은 끝없이 의미를 쫓아다니는 그녀를 꾸짖듯 그런 대답을 하고는 돌아선다. / 111p
누가 봐도 이건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이건 명백히 스포츠 정신에 위배된다. 그러니까 이건 뉴스나 기사에서 보던 괴롭힘과 따돌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녀는 엄한 어른의 얼굴을 하고, 곧장 아이들의 세계로 쳐들어가서, 옳고 그름을 운운하며 사이좋게 지내라는 하나 마나 한 충고를 게 좋은 해결책이 아님을 잘 안다. 그건 문제를 더 심화시킬 뿐이다. 그런 외부자의 피상적인 목소리로는 저 아이들의 세계에 균열을 낼 수 없다. / 122p
어색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발걸음이 교문을 향한다. 교문 앞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말로, 언어로, 아이를 위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다. 상담사로서 자신이 가졌던 굳건한 믿음의 실체가 이처럼 허약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녀는 어떤 말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이 한 말이 어떤 식으로 변형되고 왜곡되는지 짐작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진작 깨달아야 했을 말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 123p



언어가 생략된 순무와 교감을 하면서 해수는 수없이 많은 말들로 소란스럽던 세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헤아림과 공감, 위로와 포용. 그러한 감정들은 어쩌면 완전한 침묵 안에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제껏 말에 관해서라면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었고, 말로써 보이지 않는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의심해보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해수는 순무와 세이, 죽은 배우의 아내를 만남으로써 깨닫는다. 자신은 그저 넘쳐 나는 말들에 둘러싸여, 불필요한 말들을 함부로 낭비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한 말이 언제 탄생하고 어떻게 살다가 어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덕분에 나 역시 깨닫는다.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너를 이해해’라는 말들을 얼마나 많이 얼버무려왔던 왔는지를. 함부로 선의와 악의를 재단하며 경계를 세워왔는지를. 아울러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선 침묵할 줄 아는 것, 세상을 판단하는 속도를 늦추고 대신 귀를 기울이는 데서 진짜 소통이 시작되는 게 아닌지 헤아려본다. 이것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더없이 외로워진 현대인들에게 ‘경청’의 시간을 넌지시 제안하는 이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