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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과 나의 사막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평점 :

삶의 목적을 잃은 땅에서도 기어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인간이 망친 세상에서 살면서 여전히 인간적인 것들을 그리워하는 존재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부여하는 천선란 식 은유는 이토록 다정하다!
때는 49세기, 인간은 끊임없이 지구 생태를 위기에 빠뜨렸고 전쟁으로 모든 것을 소실했다. 여기에 지구 절반을 덮친 대홍수로 이제 바다와 사막만이 인류 환경의 대척점에 위치해 있을 뿐이다. 랑은 조와 함께 사막 한가운데서 살아가던 아이였다. 사막은 그저 허허벌판인, 일직선으로 나아가다 눈 깜빡임으로도 한순간에 길을 잃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자신도, 타인도 믿을 수 없는, 나의 모든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하는 바로 그런 곳. 그러던 어느 날, 랑은 전쟁이 한창 벌어졌던 2844년대에 만들어진 로봇을 우연히 발견했고 그에게 고고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랑은 나를 지나치지 못했다. 랑의 그 어떤 오지랖.
내 앞에 멈추거나 지나치는 그 한 걸음의 차이로 나는 다시 켜졌다. / 83p
하지만 이제 이 땅 위에서는 어디서도 랑을 볼 수 없다. 랑을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상실한 고고는, 랑이 고고에게 다음 목적을 만들어주지 않고 죽은 탓에 덩그러니 놓이고 만다. 랑의 친구인 지카는 고고와 랑을 땅에 묻고 난 뒤, 이곳에서 동쪽으로 대략 600킬로미터를 가면 있다던 바다로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막이 내리는 이 시대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들이 똘똘 뭉쳐 있다는 바로 그곳으로. 하지만 지카의 제안을 거절하며 고고는 드카르가의 검은 벽을 향해 가기로 결정한다. 인간의 헛된 희망이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를, 과거로 가는 땅을 향해. 언젠가 랑도 그곳에 가보고 싶어했지만 조를 두고 갈 수 없었고, 조 다음에는 고고를 두고 갈 수 없었다던 지카의 말이 고고를 그곳으로 움직이게 한 것이다. 고고에게 남은 삶의 선택지란 역시 랑이 유일했기에. 아니, 어쩌면 고고는 자신이 헤아릴 수 없는 희망이라는 영역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이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인지, 마찬가지로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인간이 품는 희망이란 것 안에서 찾아보기로 한 걸지도.
태어나는 것과 만들어지는 건 그렇게 다르다. 태어난다는 건 목적 없이 세상으로 배출되어 왜 태어났는지를 계속 찾아야 하는 것이기에, 오로지 그것뿐이기에 그 해답을 찾는 시간만큼 심장의 시계태엽은 딱 한 번 감겼지만 만들어진다는 건 분명한 목적으로 세상에 존재한다. 이유를 찾아야 할 필요도 없이 존재하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야 하는 것. 그렇기에 목적을 다할 때까지 망가지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은 계속 엔진을 교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랑이 말했다. 그 말은 목적을 다하면 꺼버린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 10p
“인간은 헛된 희망을 품는군.”
“완벽한 희망을 품어야 하나?”
“…….”
“그게 말이 되는 문장이기는 하고?”
순간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답할 수 있는 영역의 물음이 아니다. 나는 희망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어떤 것이 더 인간을 살게 하는지 알 수 없다. / 38p


드카르가의 검은 벽으로 나아가는 여정 속에서 고고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버진을, 알아이아이라 불리는 팔이 없는 로봇을, 마차부자리에서 온 외계인 살리를 만난다. 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고고는 이 사막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건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줄 신호 혹은 나를 부르는 목소리 같은 것임을, 트랙터로 사막에 길을 내는 것이 아무리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닌 행위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원하는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함이 나를 그곳으로 인도해주리라는 믿음의 소중함을 어렴풋이 매만지게 된다. 덕분에 이따금 오류처럼 기억장치가 제멋대로 랑과의 추억을 재생시킬 때면, 그것이 마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와 인간을 마비시키는 ‘그리움’이란 감정임을 감각하게 된다. “내가 만난 인간 중에서 가장 오지랖이 넓은 인간”인 랑과의 기억 덕분에 팔이 없는 알아이아이에게 자신의 한쪽 팔을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을 얻고, 생명이 살지 못하는 척박한 땅에 물을 주는 마음 같은 것이 ‘사랑’임을 체득한다.
‘선인장 신이 고고가 마음에 들었나봐. 소원 들어줬잖아.’
‘선인장 신?’
‘응, 우리가 아까 기도했던 신.’
‘……내가 기도했던 대상이 선인장이라니, 몰랐는걸.’
(…) ‘선인장은 사막에서 살아남았잖아. 그러니까 사막이랑 친한 거지. 선인장이 말하면 사막은 들어줄 수밖에 없어. 사막이 선인장을 아낀다는 거니까.’
(…) 사막이 선인장을 아낄 수 있느냐고, 단지 환경에 적응해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막이 선인장을 사랑하는 거라면 마찬가지로 억척스럽게 살아남은 인간도 사랑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생각을 음성으로 옮기진 않았다. 랑의 마지막 말을 깨고 싶지 않았다. / 79p
‘속에 주먹만 한 알갱이가 있어.’
조가 죽고, 야외 의자에 두 다리를 끌어안은 자세로 앉아 있던 랑이 말했다. 반나절 만에 처음 꺼낸 말이었다.
‘그 알갱이가 내 속을 막 두드리면서 돌아다녀. 나는 그게 무척 거슬려. 고고, 이게 뭔지 알아? 이게 울음덩어리야. 나오고 싶어서 난리가 났지. 근데 버틸 거야. 울지 않을 거야, 나는.’
나는 얼마 걷지 못하고 무릎을 굽혀 앉는다. 웅크린 자세로 앉아 내 안을 떠도는 응어리를 판단의 오류라 여기며, 어쩌면 정말 벌레가 들어간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고고, 나중에 주먹이 배를 두드리는 느낌이 나면 나한테 꼭 알려줘. 그때 같이 있어줄게.’ / 112p
언젠가 랑은 고고에게 바람이 불지 않으면 사막은 그림이 된다고 말한 적 있다. 세상을 사진처럼 인식하는 고고에게 랑은 그림에는 감정이 들어가게 하고, 감정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며 마음을 움직인다는 건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사진은 현상의 전후를 추측하게 하지만 그림은 그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게 한다고.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고고는 드카르가의 검은 벽에 다다를 즈음, 오아시스가 실재한다고 믿는 인간의 마음을 알려준 랑 덕분에 사막을 그림으로 바라보기에 이른다. 그렇게 작가 천선란은 삶의 목적을 잃은 땅에서도 기어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인간이 망친 세상에서 살면서 여전히 인간적인 것들을 그리워하는 존재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부여한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보기에 그럴싸하면 돼. 네가 감정을 진짜 느끼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느끼기에, 그 애가 그렇게 느끼기에 그렇다면 된 거야. 안 그래? 그냥 다 따라 하는 거야. 인간이라고 상대방에게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어? 영혼을 뺏어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상대방에게 감정이 있다고 믿는 순간 생기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시치미 떼. 감정도 네 것이라는 듯이 행동해.” / 134p



랑을 향한 그리움이 있는 한 ‘나의 사막’은 여느 사막과 다름을 느낄 수 있었던 고고처럼, 『랑과 나의 사막』은 가장 절망적인 시대 속에서도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감각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묵묵히 사막을 걸어갔던 고고의 여정이 그러했듯, 모든 것을 상실한 가운데서도 마음의 목적지만은 잃지 않기를 바라는 천선란 식 은유가 내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거친 사막의 선인장 그 아래 유유히 흐르는 오아시스를 대주는 마음 같은 것, 그것을 헤아리게 하는 이연미 작가의 표지 그림마저도 다정하다. 덕분에 나는 또 어느 사막 속을 헤매며 걷고 있을까, 하고 막막한 생각이 들 때면 랑과 고고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